원욱 나머지들 입니다 -_-; 왜 이리 범욱이들하고 있으면 오류가 나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싫은가?;; 어찌됐건 최근에서 다시 설정집을 봤는데 시원이가 려욱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무심해서예요. 남들 모두 자신한테 과할 정도로 친절하고 잘 대해주는데 려욱이는 호감도, 비호감도 아닌 태도로 대해서 호기심이 생겨서 지켜보다가 좋아진 거죠. 그런데 2학년 말에 유학을 가게 되자 친구로라도 우선 접근을 시도한 겁니다. 과한 표현이 됐지만 려욱이는 별탈없이 받아들여주죠. 하지만 시원이가 좋아하는 건 친구로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려욱이는 알고 있지만 받아줄 생각도 없어요.
뭐,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완결나서 다행이지만 전 이제 제목만 봐도 징글징글. ㅋㅋㅋ 고생 좀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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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안녕하세요, 하느님 (부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이들 사이에는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불안감이라고까지 표현할 필요는 없지만 10월 중순에 끝난 중간고사와 더불어 이제 채 한달 남은 수능일에 2학년인 우리들이 왜 겁을 집어먹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이제 농담 삼아 고3이란 단어를 입에 붙이듯 하였고 우리도 종종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아직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라 그런지 잠시 나온 이야기는 곧 쑥 들어가곤 했다. 그것도 모의고사를 치고 난 후에야 큰일이니 뭐니 떠들어 댈 뿐인 얘깃거리였다.
축제를 대비해 우리 동아리는 각 시대별로 유행했던 것들에 대한 것을 주제로 삼았다. 60년대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유행했던 것들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고, 남는 여백에는 어렸을 때 주로 우리들에게 인기 있었던 만화영화나 놀잇감따위를 소개하기로 했다. 꽤나 재미있는 축제가 될 것 같다며 실실 웃는 성민이에게 글씨 담당은 네가 하라고 했더니 금새 안색이 싹 바뀌어서 대드는 것을 이마를 꾹 눌러주었다. 그 바람에 또 징징거리는 성민이를 규현이는 늘 그랬듯 무심하게 ‘네가 제일 글씨가 예뻐’라고 해주어 달랬다. 덕분에 또 ‘내가 좀 그렇지?! 그렇지??’라며 반색을 하고 드는 녀석이 한심해보인 것은 두말하면 이젠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11월로 접어들면서 축제 준비는 박차를 가했다. 수능이 끝나고 펼쳐질 축제가 너무 늦는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3학년 선배들 입장에선 좋은 일이다. 작년에는 축제에 영화제작부 아이들이 도중에 혼나는 바람에 잠시 즐거운 분위기가 산통 깬 적이 있긴 했지만. 같잖은 고등학교 내에서 서열이니 학년이니 따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연극부나, 방송부 등 군기 잡기로 유명한 곳은 절로 고개를 저을 정도로 싫어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선배들 투정을 다 받아줘, 하면서 투덜거리면 성민이는 그래도 우리 동아리는 가족적이라서 다행이다, 라면서 또 웃었다. 잘 자란 중산층 집안의 도련님인 성민이는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였다. 나 또한 그런 면을 좋아한 것이기 때문에 가끔은 도를 지나쳐도 귀엽게 볼 수 밖에 없는 사람 또한
미술 등에 그닥 재주가 없는 나는 규현이가 광고 포스터를 제작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간식을 사다 주기도 했고 없는 재주를 이용해서 그림을 붙여주기도 했다. 강당에서 그다지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고 중앙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재주 좋게 우리 동아리는 작년에 이어 자리를 낚았다. 사람 많이 모으는 것보다 11월 하반기의 강추위를 이겨내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브이를 그리며 기뻐하는 규현이를 보면 가끔 영락없는 아이라 이 녀석이 나에게 귀엽다고 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이기도 했다. 1학년 여자 후배들보다 글씨도 예쁘게 쓰고, 옆에서 방싯거리면서 어울리는
하지만 꾸미는 것에 재주가 없어서 그닥 하는 일도 없던 나는 은혁이의 ‘시원이의 연습상대가 돼줘’란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규현이나 성민이는 탐탁치 않아 했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축제까지는 보름 정도 남았던 때였다.
**
시원이의 진지한 어투에 피식 웃음이 나려다가 다시금 감정을 잡고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시원아-. 빼지 마. 다 알면서. 어때? 솔직하게… 말해 봐. 응?”
“……그, 그…….”
“어려도… 우리 알 거 다 알잖아. 방이 왜 이렇게 덥지?… 시원아… 넌… 안 덥니?”
“……더, 덥……덥…….”
정말 더운 듯이 긴장이 팍! 들어간 얼굴로 소파의 팔 걸치는 부분에 앉은 나를 쳐다보는 시원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으며 지긋이 쳐다보니 당황하는 기색이 너무 …웃기다.
“으하하하하!! 거 봐, 너도 똑같다니까!!!
“…… 푸, 풋…푸하하하하!! 아 – 미안미안. 나 정말 못 참겠어. 은혁이만 보면 웃겨 죽겠어. 어떡해~ 정말. 이번 캐스팅 진짜 끝내준다. 완벽해!! 큭큭큭큭~.”
“아- 씨!!!!!! 잘 되고 있었는데!!!!
“다들 합의 해서 결정한 건데 왜 또 그래~. 그만 좀 해라, 은혁아~.”
짠- 하고 등장한 은혁이의 대사에 은혁이를 뺀 우리 3명은 정말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선영이가 집안 사정으로 연습에서 빠지게 됐다. 시원이의 추천으로 대본연습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되긴 했지만 (4명이서 주인공 시원이의 상대역 해주기 쯤이랄까?) 현우의 잦은 웃음은 곧잘 방해가 되었다. 그만큼 은혁이가 대사를 너무 리얼하게 하는 탓도 있긴 했지만.
시원이나 은혁이는 이미 대본을 보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어서 시원이 대본을 들고서 연기를 맞춰줘야 했다. 시원이는 나에게 굉장히 미안해 했지만 은혁이가 막무가내로 고집부리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추천은 시원이가 했지만 나에게 와서 부탁을 한 것도, 진행을 하는 것도 은혁이였으니까. 전에는 그다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나 또한 신경 써주지 않았는데 친해진 후 의외로 착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1학년 때 우연찮게 다퉜을 때도 먼저 사과했었네…. 은혁이를 너무 오해했었다.
“정말 그렇지 않냐, 려욱아?!!?!? 네 생각에도 이렇게 착하고 깜찍한 나는 천사가 어울리지 않니!!!”
“……응?”
“아냐? 아냐?!? 네가 보기에 정말 난,
“저… 그렇지만, 은혁이 너 상당히 잘 어울려. 뭐랄까… 멋있어 보여.”
“… 진짜?”
“응. 정말로.”
어린애를 타이르듯 말을 했더니 금새 단순하게 넘어간다. 물론 정말 잘 어울린다. 웃겨서….
미리미리 편집부 일을 끝낸데다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본연습을 하는 동안은 시원이랑 자주 하교를 같이 했다. 덕분에 꽤 많이 가까워져서 농담도, 때리는 장난에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
우리 학교 또한 수능 시험장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전날에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기어이 2교시까지 수업을 하고서 교실을 정리했다. 커튼은 이미 전주에 빨아온 상태였고, 교실 뒤쪽의 게시판, 칠판 옆의 공지사항이나 시간표 위에는 새하얀 전지가 덮혔다. 책상을 몇 개 빼내고 창문을 열어 놓으니 햇빛이 전에 없이 교실에 밝게 비춰 들었다. 평소 수업시간에는 커튼을 내내 쳐두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왠지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꽤 흥이 났다. 문·이과 선배들이 시험을 치는 장소가 달라서 나와 규현이는 문과 선배들 쪽, 성민이는 이과 선배들 쪽을 응원하기로 했다. 1학년 여자 후배들은 모두 성민이와 응원하러 가는 덕에 뭔가 빈정이 상했다.
수능 전날은 오히려 내가 뒤척거리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어설픈 악몽까지 꿔가면서 일어나 버스를 타고 간 수능 시험장이 낯익다. 작년에도 와본 곳이라 그런가. 문과니까 내년엔 어쩌면 내가 이 곳에서 시험칠 지도 모르겠네, 하며 시험장인 학교를 가는 골목길로 종종거리며 걸어갔다. 의외로 쌀쌀하지 않은 날씨에 이번 수능은 안 어려우려나 보다, 라며 칭칭 둘러싼 목도리를 코에 더 올려 두었다. 이미 교문 앞 저 멀리서부터 각 학교 별로 응원무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작년에도 놀랐지만 항상 모르는 학교 이름이 너무 많다. 꽤나 타이트한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들을 보니 춥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 우선에 규현이를 찾아야 했다. 준비해뒀던 초콜렛과 손난로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응원단의 아우성들에 휘말려 제대로 통화가 되지 않았다. 드문드문 걸어오는 수험생들과 부모님들과 와글와글 몰려있는 응원단은 뭔가 부조화였다. 교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통화를 하고 있는데 뭔가 뒤에서 확 덮쳐오는 느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시원이가 씩 웃으면서 뒤를 끌어안고 있었다. 통화를 종료하고 떨어져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으니 장갑을 안 껴서 그런지 손이 얼음장이었다.
“세상에…. 손이 완전 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학교는 어디야?”
“엉? 우리 어제 학교 마치고부터 돌아가면서 자리 맡었다? 큭큭. 그래서 거의 제일 앞자리야. 어제 여기서 밤샜어. 학생회 애들이랑 연합해서. 우리 선배들이 좀 까칠하잖냐.”
어이가 없어서 서 있으려니 시원이가 점퍼 주머니에서 손난로를 꺼내서 비볐다. 내 손에 쥐어주는 손난로가 미지근했다. 너나 하라고 핀잔주고서 나란히 걷는데 목소리도 이미 간 것 같다. 어젯밤부터 찬바람 맞고 기다렸으니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이런 상태로는 아무래도 축제 마지막 날 연극은 무리일 것 같다. 시현 누나에 대해 물으니 이미 수시 1학기를 통과한 상태라서 보러 올지 모르겠다며 볼을 긁적였다. 합격 여부가 하필 수능 원서 접수 둘째 날이어서 단체 등록이라고 돈 넣어놓으니 합격 통보가 날아와서 얼마나 분해했는지 모른다면서 실실 웃는데 얼굴이 이마를 빼고는 꽤나 빨갛다.
어느새 우리학교 응원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학생회와 연극부 연합이라더니 다른 동아리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저들끼리 잡담하기 바빴다. 간간이 보이는 선배들만 보면 우렁차게 소리 높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선배들 잡게 생겼다. 규현이와 후배들을 보고서 가려다 말고 종이 봉투에서 후배들 주려고 사왔던 손난로를 꺼냈다. 당황해 하는 시원이 손에 쥐어주고 규현이한테 뛰어가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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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냐…. 아무래도 종운이 형은 우리보다 먼저 왔었나 봐. 아님 우리 피해서 일부러 다른 데로 들어갔던지. 교문이 큰 쪽에만 신경 썼나 봐. 응. 응. 그래, 규현이랑 너네 집으로 갈게. 어. 어. 여자애들 잘 보내고. 그래. 어차피 마무리니까. 어. 그래. 끊어.”
희철이 형은 초콜렛이랑 손난로 받고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잘 들어갔건만 종운이 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경찰 아저씨 오토바이를 타고 온 형도 들어갔건만. 닫히는 교문 주위에는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합장을 하는 부모님들만이 남았다. 성민이가 간 이과 선배들은 다들 잘 만났다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종운이 형이 워낙 나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은 알았지만 애꿎은 종이봉투만 발로 차면서 걷고 있었다.
남자 후배들과 찢어지고서 버스를 타려고 학교로 통하는 골목길을 벗어나니 겨울 바람이 매섭다. 다시금 점퍼를 끝까지 채우고 목도리를 칭칭 둘렀다. 규현이는 꽤나 심플한 차림인데도 별로 안 추운 모양이다. 감기 걸린다고 놀리는 데도 괜찮다고 피식 웃는 걸로 봐서는 또 속으로 어린애 취급 하고 있는 모양이다.
“너도
“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규현이가 대뜸 던지는 말에 어이가 없다. 정류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놀래서 규현이를 쳐다보는데 규현이는 여전히 저 멀리 버스를 기다리는 척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뭐라는 거야, 속으로 또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괜히 목도리를 다듬는 척 했다.
“왜? 너도 좋아해?”
“-… 나는.”
“……- 말해. 친해지고 싶으면 친해지면 되잖아. 잘 됐네. 나도 그렇게 안 친한데 너랑 같이 친해지면 덜 뻘쭘하겠다. 좋잖아. 인기인인데. 아냐?”
“그런 식으로 말 하지 마.”
“…….”
괜히 꽁해진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목도리로 턱을 감추고, 고개를 계속 내렸다. 어느새 인중 위로 올라온 목도리 아래로 더 숙이니 코 위에 면이 덮혔다. 추워. 올해 수능은 어렵겠네. 바람이 불어서 춥나. 아니면 그냥 기온이 낮은가. 이래저래 추워. 어쨌든 추워. 손을 주머니에 넣고서 빼지 않았다. 꼭 쥔 주먹에 손가락만 차갑다.
종이봉투에 종운이 형을 주려던 손난로가 생각났다. 똑,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얗게 굳어가는 고체를 덮은 비닐을 조심조심 만졌다. 갑자기 내 손을 덮어오는 규현이의 큰 손에 짐짓 놀랬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속으론 손바닥에 닿아 곧 굳어가는 손난로가 뜨거워 죽겠는데 주제에 자존심이라고 말없이 있었다.
“
“………….”
“나는…. 됐다. 그만하자.”
됐긴 뭐가 됐어. 떨어져나가는 규현이 손바닥이 괜히 차가운 것 같다. 규현이가 무슨 말을 삼켰는지 알기 때문일까. 난 또 나쁜 놈 됐네. 규현이 마음도 모르고
**
“축, 제 50회 신동 고등학교 축제. 얼씨구.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저렇게 현수막 걸고 지랄이야, 지랄이. 아, 웃겨.”
“그래도 작년보다 디자인은 좀 나은 것 같은데.”
“뭐. 안 그러면? 사립이라고 쳐먹는 등록금이 얼만데. 알아서 저 정도는 해야지.”
간만에 운이 좋아 아침에 만난 성민이와 같이 걸어오고 있는데 왠일인지 불만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남이 보면 웃으면서 하는 말이라 나와 아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줄 알겠지. 웃으면서 하는 말이 평소보다 살짝 거칠다. 도대체 누가 또 네 기분을 상하게 한 거냐. 어제 축제 게시물도 잘 붙여놓고 헤어질 때만해도 방긋거리면서 웃던 녀석이 지금은 옆에서 빈정대고 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은 중학교 때부터 간혹 있어왔던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지만 잘못 걸리면 크게 깨지기 때문에 조심은 하고 있었다.
“너도
“… 엉?”
“좋냐고, 빙구야.”
“… 어휴, 씨발. 접근할 때부터 바리게이트를 쳤어야 했는데.”
“뭐?”
“아니다, 령구야. 어쨌거나 이 형님이 한 말씀 내리겠어. 자고로 남자는 모두 늑대라 했다. 경계만이 네가 살 길이라는 거지.”
“…… 넌 남자 아니야?”
“난 친구지.”
“웃기네. 그리구 나도 남자거던? 헹!”
저 혼자 중얼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웃던 얼굴 싹 바꿔서 정색하면서 하는 말이 ‘남자는 모두 늑대.’라니. 그걸 누가 몰라? 나부터도 남잔데. 주먹으로 등을 살짝 내리치고는 후다닥 뛰었다. 그래봤자 100m 15초의 성적으로 무슨 도망을 기대했겠는가 싶지만. 중학교 때 육상부였던 성민이가 내 등짝을 세게 내리치면서 결국 난 아침부터 매를 벌고 말았다.
**
4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에 둘째날 저녁이 저물어갔다.
“뭐야? 너만 있냐? 1학년 애들은?”
“네?… 규현이도 있는데… 어… 지금 연락 할게요.”
부스에 온 형들이 방명록이 있는 탁자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누나들은 바쁘신가 봐요?- 하는 규현이 목소리를 뒤로 하고서 휴대폰으로 성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은 플라이 투더 스카이인데 너 지금 내려오면 희철이 형한테 언더 그라운드로 밟히게 생겼어. 빨리 받아라, 바보야!! 속으로 동동 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장미꽃을 한 송이씩 포장해서 들고 다니는 토끼 인형 옷을 입은 녀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왜 나한테 와? – 토끼가 멈춰 서니 같이 다니던 시원이도 뛰어왔다. 정장을 입어 놔서 그런가, 교복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직 성민이는 전화를 안 받고 있다.
갑자기 장미를 들이미는 토끼 때문에 당황해 멍청히 서 있었다. 귀에서는 여전히 플라이 투더 스카이의 중력이 나오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려욱이한테 주려고?”
고개를 끄덕이는 토끼. 시원이 토끼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인형 머리를 때렸다. 그 바람에 살짝 돌아간 머리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지 토끼가 방방 뛰기 시작했다. 시원이가 당황해서 그런 토끼를 잡으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아, 알았어. 알았어. 해주면 되잖아. 해주면!! 근데 왜 려욱이한테 니가 해주는 거야? 짜식이…. 려욱아. 잠시만 가만히 있어봐. 이거 우리 동아리에서 돈 벌려고 하는 짓이거든. 흠흠. 그니까 오해하지 말구.”
“어? 어…. 알았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시원이 덕에 나는 그저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 속에 가득했다. 어느새 내 한쪽 손을 잡은 시원이는 그대로 나를 올려다봤다. 옆에서 인형 손바닥으로 박수치는 토끼 때문에 정신이 사납다. 손에 들린 휴대폰을 시원이가 살짝 빼는데도 뻥져 있었다. 나를 그대로 올려다보던 시원이는 어느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 시원이가 부르는 노래는 팀의 ‘사랑합니다’였다. 그제야 나는 여학생들에게 콜 이벤트로 진행 중이라는 일이 나에게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한 소절 마치고서 내 손등에 입을 맞춘 시원이가 일어서자 주위에서 환호성이 쏟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로 여자애들이. 내 손을 잡으며 빼냈던 휴대폰을 시원이가 다시 쥐어주었다. 미친 듯이 진동하는 휴대폰 폴더를 열어 귓가에 대니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가 강당에 울렸다.
“
… 강당에 쩌렁쩌렁 울린 이성민의 고함소리. 내가 있는 곳은 1층인데 고함소리는 2층에서 들리네. 고개를 들어보니 얼굴이 시뻘개진 성민이가 휴대폰을 들고서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다. 창피하다… 진짜. 폴더를 귓가에서 내리고 성민이를 쳐다보는데 1학년 후배들 전부 녀석 옆에 모여있었다. 거기서 놀고 있었던 거구나. 성민아. 넌 이제 진짜 끝났구나.
저 멀리서 희철이 형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종운이 형은 의자에 앉아서 몸만 돌린 채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웃음이 나오나요? 희철이 형의 저 표정을 보고도…. 규현이의 굳은 표정도 나를 크게 걱정시킬 거리는 못 되었다. 내 어깨를 잡은 희철이 형이 아직 통화중인 내 휴대폰에 대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성민아. 지금 당장 10초 내로 내려와라. 1학년 후배들 데리고. 오랜만에 정신교육 좀 하자.”
성민아. 네가 만약 2층에서 내 이름을 불렀으면 난 정말 너랑 절교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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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녕하세요, 하느님 (부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기 마이크 다시 한 번 점검해 봐!! 조명! 어디 갔어?! 장난하나!”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셋째 날이자 금요일 저녁. 학교는 왠일인지 아이들에게 후했다. 꽤 먼 곳의 최근 신축한 건물의 강당을 빌려서 음악제를 연 것이다. 그 소식에 모든 아이들이 들떴었다. 나는 무대 근처의 좌석에서
무사히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 뒤로 빠져 나왔다. 객석에서는 먼저 리허설을 하고 쉬고 있던 연극부 아이들이 음악제를 하는 아이들의 리허설을 보며 호응해줬다. 마치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가려는데 시원이가 흔드는 손에 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성민이는 철부지처럼 한다발 안은 폭죽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렇게 우리끼리 있으니까, 꼭 우리가 학교 빌린 거 같지! 그치?!”
“그래, 그래…. 어지간히 좋기도 하겠다. 춥지도 않냐? 이런 겨울에 무슨 축제 뒷풀이야-.”
“씨이, 넌 그럼 빠지든가! 그러면서 다 끼는 주제에!! 메롱이다, 메롱!”
“…… 유치해….”
결국 발끈하며 들고 있던 폭죽 막대기들 중 하나를 들어 나를 퍽퍽 때리는
“어~~, 뭐야, 뭐야~. 니들 아직 집에 안 갔냐?! 폭죽 소리 나서 뒷풀이 하다가 왔잖아!”
멀리서 은혁이가 뛰어왔다. 연극부는 아무래도 저렴하게 학교에서 뒷풀이를 할 셈인가 보다. 5월에 연극제 때 100만원인가 상금도 탔다면서. 쪼잖하다니까, 우리 학교. 피식 웃으면서 올려다보는데 어느새 시원이도 따라와 헥헥 거리며 서 있었다.
“있었네?”
그 말만 하고서 또 씨익 웃어보이는 사람 좋은 웃음에 나도 같이 웃었다. 축제 둘째날 일로 성민이와 은혁이는 대판 싸웠다. 물론 성민이의 말빨에 결국 은혁이가 졌지만. 먼저 말을 걸지 않으리라 했던 내 예상과 달리 성민이는 은혁이에게 몇 개 가지고 있던 폭죽을 던져 주었다.
“맘대로 해! 왔으니까 하던지. 아씨, 김려욱 안 일어나?! 궁상맞게 자꾸 앉아있을래??”
“남이사!”
결국에는 삐져서 규현이에게 달려가는 성민이를 보다가 은혁이가 내미는 폭죽 하나를 받아 들었다.
“너도 해. 그래야 뒷풀이지. 짧았지만 시원이 상대역 한다고 고생했어. …근데 진짜 잘 하더라. 킥킥. 너 왜 우리부 안 들어왔어? 진짜 아깝다. 연기력 완전 짱인데.”
은혁이에게서 받은 폭죽을 들고 일어서나 어느새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주었다. 시원이 것에도, 은혁이 것에도 불이 붙여졌고 불꽃을 뿜으며 타 들어가는 폭죽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서 바라봤다. 어느새 다 타 버린 폭죽 쓰레기가 땅에 떨어졌다. 은혁이가 성민이에게서 더 받아오겠다고 떠나자 나와 시원이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연극 잘 했어. 연습 때보다 훨씬 잘 하더라. 재밌었어.”
“-…려욱아.”
“응?”
“나 말야….”
“김려욱!!
시원이가 무언가 말하려던 차에 은혁이의 큰 외침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리와!! 같이 해!!!!”
옆에서 폭죽 막대기를 들며 외치는 성민이를 보고 웃다가 뛰어 가려다 멈칫했다. 시원이는 여전히 부동 자세로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있었다. 무표정 같았지만 할말이 있다는 듯 나를 보는 눈동자에 나도 자세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할 말 있어?”
“…… 아니…. 이제 곧 무용 수행평가인데, 나 좀 도와달라고. 나 여자파트 하는데 아직 제대로 못 외웠거든…. 창민이가 하도 닦달해서….”
“아- 맞다. 너 키가 커서 창민이랑 하지? 남자 둘이 한다고 고생 좀 했겠다. 창민이가 처음에 바락바락 뭐라 하더니, 결국 네가 여자역할 했었지? 그런데 네 키 너무 커서…. 규현이는 어때? 규현이도 그럭저럭 외운 거 같던데.”
“어?… 나 규현이는 쫌- 그래.”
난감하다는 듯 짓는 웃음에 나도 모르게 수긍했다. 멀리서 화가 난 듯이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은혁이와 성민이를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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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을 중얼거리면서 박자를 맞춰 춤을 췄다. 사교댄스를 어째서 배워야 하는지 이해는 안 됐지만 여학생들이 있는 학교에서 꼭 해보고 싶었다며 방긋이 웃는 체육 선생님을 어떻게 못 하니까, 뭐…. 시원이의 큰 키 덕에 연습도중 종종 내가 끌려가기도 했다. 12월 초까지니까 겨우 일주일 남았기 때문에 시원이는 정말 열심히 했다. 그 이후로는 시원이와 있으면서 춤을 안 춘 적이 없다.
…그렇지만 정말 키 큰 여자라고 암시하고 시원이를 상대하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특히 동작 중에서 내 팔 밑을 도는 부분이라던지, 내가 끌어당기면 돌면서 안기는 부분이라던지…. 내 키가 작은 것을 이렇게 한탄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내 팔자야…….
**
“시원이 챙겨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
“예? 아, 아뇨, 저야말로…. 시원이 같은 아이랑 친하다는 거 정말 영광이에요.”
“흠… 그렇니?”
살며시 웃으며 컵을 들어 차를 마신 시현 누나는 다시 심각해진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단순히 학생회장의 글을 받으려 했을 뿐인데 굳이 나에게 대접하겠다며 주말에 시내의 카페로 나를 불렀다. 목구멍에 돌 삼키는 기분으로 밥을 먹은 후 처음으로 디저트를 시킨 후 하신 말씀이 ‘시원이 챙겨줘서 고마워.’라니…. 뭔가 이상했지만 예의상 대답을 했을 뿐인데 누나의 표정이 밝지 않다. 내가 뭐 잘못했나?
“네가 보는 시원이는 어떤 아이야?”
“네?”
“…솔직히 누나인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시원이는 그야말로 엄마친구아들이라고 생각해. 공부도 그만하면 빠지지 않고, 인기도 괜찮고, 얼굴도 그만하면 잘 생겼잖아. 키도 크고, 돈도 많고….”
“그, 그렇죠…….”
어쩌란 거야? …난감해서 그냥 비싯 웃으면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카페 안이 그다지 덥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민망함 때문일까? 창 밖은 흐린 하늘이 건물 위를 덮고 있었다.
“시원이는… 부족한 게 없지. 뭐든…. 그래서일까? 집착을 하지 않아. 부모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적이고, 반항 따윈 모르지…. 승부욕도 별로 없어. 양보해버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의가 없거나 한 것도 아냐. 일반 가정에서 가르치는 예의쯤은 아니까. 그래서 난 그게 시원이의 문제라고 생각했어. 시원이가 풀어야만 할 문제. 사람에 대한 사랑, 호의 그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 시원이는 잘 몰라. 배우기 전에 이미 가득히 받아서…. 그렇지만 만약 나중에 시원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그 마음을 표현해야만 할 때… 물론 그 사람이 시원이를 먼저 사랑해주고, 둘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편하겠지.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원이 혼자의 일방적인 사랑이면? 그 때 시원이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렇지만… 시원이는 정이 많아서, 전 한번도 누나가 그렇게 고민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 했어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잘 표현하는 것 같은데….”
“그렇니? …처음에 너와 친해지려고 애쓸 때, 자연스러웠니?”
“……그, 그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나쁜 뜻으로 그런게 아니잖아요?! 저, 전 그래서- 그래서! 물론 약간은 왜 저렇게 잘난 애가 나랑 친해지려고 할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하는 말인데도 뒤죽박죽 엉망진창. 한심해, 김려욱!
“어쨌든 전 시원이가 싫은 적은 없었어요!!”
“정말이야?”
누나의 다짐을 받아내듯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눈웃음을 곱게 지었다.
“다행이다. 중국 가기 전에 알고 싶었는데.”
“…네?”
“시원이가 말 안 했어? 방학 시작하자마자 출국할 거야. 2학기 시작할 때 이미 담임 선생님과 상의도 끝냈는걸. 중간에 아버지 오셔서 여러 가지 확인 절차도 마쳤고.”
누나는 웃으며 다시 차를 마셨지만 나는 뒷통수를 크게 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 와중에 원고를 챙겨서 카페 밖으로 급하게 뛰어나왔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동네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순간만큼은 머리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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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안녕하세요, 하느님 – 完 -(부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버스에 내린 후에야 알았다. 버스 안에서 수증기로 뿌얘진 창문 때문에 몰랐다. 내리자마자 차가운 눈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곧 버스가 떠났고 난 잠시 멍청해졌다. 지금 왜 내가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머리 속의 퓨즈가 끊긴 것처럼 움직이지 못 했다. 사고회로가 정지해 버렸다.
그리고 걷지 못 했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내리고서 벤치에 앉았다. 유리벽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올리니 까만 천장이 보였다. 춥다. 원고가 담긴 갈색봉투를 끌어안고서 앞을 보니 여전히 눈이 내렸다. 도로 위는 젖어 들어갔다.
어쩌려던 걸까? 나…. 무작정 시원이네 집에 찾아가서 어쩔 작정이었지? 생각해보면 나와 시원이는 이제까지 같은 반 친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시원이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그것도 성민이나 규현이 같은 느낌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아직도 거리는 멀다. 좁혀지지 않는 시원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어쩌면 고속도로보다도 먼 거리가 아닐까? 잠시 가까워진 걸로 우쭐해져서, 시원이가 날 좋아한다는 그 사실에 같잖은 우월감에 취해서, 난 뭘 어떻게 하려던 걸까.
한숨이 났다. 뿌연 입김이 흐르다 곧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류장에서 벗어났다. 집에 가고 싶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오피스텔을 지나쳐 집에 도착했다. 들어서면서 동생이 빨리 왔네, 라는 식으로 평소답지 않게 말을 붙였지만 대꾸해주고 싶지 않았다. 외투를 벗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머리가 아프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잤다.
**
누나를 만난 이후로 나는 시원이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고, 시원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늘 오던 문자는 끊겼다. 시원이의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말해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것일까. 아니면 그가 가는 것이 섭섭한 걸까. 그런 질문이 서로 머릿 속에서 실갱이를 벌이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척, 쾌활한 척 했다. 교지는 어느덧 교정을 보는 시기가 됐다. 자주 야자를 빠져 인쇄소에 들락거리는 것도 시원이와 보지 않는데 이유가 됐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그랬기에 무용 수행평가 아침에 나에게 춤을 봐달라는 그의 제안은 좀 어색했다. 2교시가 마친 후 연극부실로 간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연극부실은 냉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들었어?”
“어?”
조용하던 연극부실에 시원이의 목소리가 잠시 머물렀다. 직감적으로 무슨 질문인지 깨달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의자에 앉아 나를 보던 시원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던 시원이가 머뭇거리듯 깍지 낀 양쪽 손에서 엄지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었다.
고민하는 거니?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지.
그냥 웃으면서 잘 됐다고, 부럽다고 말하면 이 상황을 쉽게 넘길 수 있을까. 차가운 머리 속은 시원이의 그런 머뭇거림조차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 한다.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여전히 시원이와 떨어진 채 연극부실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중앙 의자에 앉아있는 시원이가 더 멀게 느껴진다. 다가갈 수가 없다. 발걸음이, 움직이질 않아.
“…일요일에… 영화 보러 갈래?”
“-…알았어. 아, 곧 종 치겠다. 한 번이라도 맞춰보자.”
시원이의 제안에 별 머뭇거림 없이 긍정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내 어깨에 올려진 시원이의 왼손이, 시원이의 허리를 잡은 내 왼손이, 맞잡은 서로의 오른손이. 왠지 이전보다 좀 더, 시원이의 손에 힘이 느껴진 건 내 착각이겠지. 이 거리만큼 우리 둘이 가까워진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에 우린 너무 늦은 거 같아.
나는 또 슬그머니 잡은 손에 힘을 빼내고 있었다.
**
“방학이래봤자 니들은 고삼이니까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해라. 보충교재 제대로 다 사서 와. 알겠냐?”
“너무해요- 선생님~”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여자애들 콧소리 징그러우니까 내지 말고! 남자애들, 니들은 그게 애교냐? 반장! 인사!”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이 일어나 각자 짐을 챙기는 동안 멍하니 앉아있는 등에 둔탁한 주먹이 느껴졌다. 성민이가 옆에서 씨익 쪼개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깨에 둘려지는 팔이 느껴졌다.
“집에 가자!! 아, 진짜 기말고사 왕짜증 아니냐? 목금토 연달아서 쳐버리고! 기말고사면 4일쯤은 줘야지. 보충 시작하면 1월인가? 흑, 우리도 이제 수능이 멀지 않았구나….”
“집에 가자, 려욱아.”
“응.”
성민이는 자기 말을 씹는다며 또 쫑알쫑알 거렸지만 그다지 대꾸해주고 싶지 않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거야. 집에 가는 길에 볼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는 내 행동에 규현이나 성민이는 내가 미친줄 알았는지 호들갑을 떨었다(-성민이만…). 나사가 빠진 듯, 멍청한 내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 하고 하루가 흘렀다.
**
[Rrrrrrrrrr…Rrrrrr-…]
코트를 입고 나가려는데 조용한 거실에 전화벨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 말고 행동을 멈추고 있으려니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몇 번 통상적인 대화가 오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덕에 같이 놀래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통화하는 것을 보다가 휴대폰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야!!! 김려욱! 너 들었어?!”]
“뭘?”
[“임마! 너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냐!!!! 야, 규현이 사고 났대!!!!!!!!”]
“뭐?”
[“그 새끼 도서관 가다가 차에 치였대!!!!! 지금 수술 들어갔다고 그러던데 연락 안 왔어?! 거기 연대 뭐야?! 세브란스인가 거기서 수술하고 있다던데 빨리 가자!!”]
“아, 알았어!! 너 지금 어디야?!”
휴대폰을 들고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쥐어준 돈에 인사만 하고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성민이와 만나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소름이 온 몸에 돋았다. 굳어버린 채로 떠는 손을 성민이가 잡아주었지만 가는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
끔찍한 시간이 지나갔다. 다행히 수술을 할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규현이의 의식은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택시에 치였다고 하던데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보호자라고는 아버지 하나뿐인데, 그 아버지는 병원에 와서 설명을 듣더니 크게 놀라지도 않은 채 나와 성민이에게 규현이를 부탁하고 가버렸다. 입원비니, 무엇이니 다 내주었으니 사실 남은 것은 가족의 간병쯤이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다. 규현이의 여동생(민지)은 나와 성민이에게 미안하다며 가도 괜찮다고 했지만, 여자아이 혼자서 병실을 내내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 돌아가며 규현이를 지키기로 했다.
8인실에 있다가 민지의 부탁으로 2인실에 옮긴 후에야 조용함을 느꼈다. 여전히 병원은 밝았고 시끄러웠지만 2인실은 그나마 덜했다. 그닥 넓지 않은 병실에서 나는 민지와 함께 있었다. 어머니도 사정을 듣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병원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미안. 첫날부터 너한테 먼저 부탁하고. 민지야,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내일은 오빠랑 같이 돌보자. 알았지?”
“네…. 미안해요, 오빠들… 모두… 정말 고마워요.”
“괜찮아. 친구잖아. 분명 곧 깨어날 거야. 려욱이 넌 나 가는 길 좀 데려다 줘.”
“그래….”
민지를 남겨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정문으로 나왔다. 바깥 바람에 추위를 느끼는데 성민이가 말을 걸었다.
“
아는구나. 그러고보니 오늘 시원이하고 약속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실은 규현이가 실려온 것을 확인하고, 8인실에서 2인실로 옮길 때도, 규현이네 아버지가 와서 의사와 대화할 때에도 시원이 생각이 잠깐씩 났다. 그럼에도 이상한 기분에 연락을 주지 못 했다. 아마 화가 났을까. 말도 없이 약속에 나가지 않은 나를 시원이는 기분 나쁘게 여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차라리 그게 낫다고 여기는 건 도대체 뭘까.
“…어차피 너 잡을 생각 없잖아.”
“응.”
“친구로서는 아마 안 될 테니까.”
“?”
“나 간다. 민지 잘 챙겨줘. 내일 봐.”
나도 알아.
-라고 대꾸하려는데 이미 택시를 잡고 떠나버렸다. 가볍게 내 뒷목을 두드리며 웃는 성민이가 왠지 이상했다. 항상 날 어린아이 취급 해 오던 성민이라 넘기려 했지만 그의 말 뜻은 나도 안다. 친구로서는 안 돼. 시원이를 잡고 싶으면 친구로서는 남을 수 없어. 성민이가 타고 간 택시가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분이 우울해졌다.
어떤 선택을 해도 이미 늦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나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반 친구, 이젠 그 이상이겠지만. 그렇다고 성민이나 규현이 같은 느낌은 아니야. 그렇다면 뭐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쉬운 관계로 치부하고 싶지 않아서야.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겁이 많아서, 무서워서 이런 식으로 구는 거래도 난, 지금의 나를 용서하고 싶어. 지금은 규현이 일만 생각해.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겨울 바람은 너무 매섭다.
**
“그거 시원이가 밴드부 애 중이 리드하는 애 꼬셔서 그거 하라고 한 거야…. 킥킥. 그 덕에 여자 선배들한테 인기는 많아져서 좋았지만. 애정표현이란 노래가 그렇게 인기 끌 줄은 나도 몰랐지. 아씨, 근데
성민이는 이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고도 술잔을 뺏기지 않으려는 듯 꼭 쥐고 있는 덕에 은혁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진짜 징하다. 그만큼 마셨으면 그만 마실 것이지. 넌 무슨 술자루냐? 지독하다, 지독해.”
“뭐어-… 내놔… 내 수울…… 내 수울-!!”
원서를 쓰고 난 후라서 이런 걸까. 20세가 된 첫날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우리들. 1월 1일,
“성민이 아무래도 여기서 재우고 가야겠다.”
“규현이 넌? 민지 놔두고 괜찮겠어?”
“민지는 진작에 자고 있을걸. 문단속 잘 하라고 했으니까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규현이 덕에 나도 웃었다. 교통사고 후로 규현이는 부쩍 밝아졌다. 의아했지만, 규현이 말로는 다치고 나니까 자신한테 남들이 얼마나 잘 대해줬는지 알겠다고 했다. 이해하기 약간 어려웠지만, 병원에서 갑자기 나한테 미안했다고 하는 덕에 깜짝 놀란 적도 있으니까. 확실히 사고가 무서운 거긴 무서운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다니.
“려욱이 너 안 가 봐도 돼? 부모님 걱정하실 텐데.”
“그럴까?”
때마침 울리는 벨소리에 숨죽이고서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쏟아지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기범이, 규현이와 은혁이가 킥킥 웃어댔다. 겨우 끊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야겠다. 미안. 다음에 보자.”
“그래, 조심해서 잘 가-.”
다들 앉아서 (성민이만 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범이는 일어나서 아파트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다녀왔어.”
“응.”
“인사해줄래?”
“인사?”
“새로 시작하는 기념.”
여전히 거리는 그대로였다.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 멈춘 걸음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좁혀지지 않은 거리 사이에 그와 나의 시선이, 목소리가 있었다.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어색하지 않아서 이상할 정도로 기뻤다. 다시 만나면 어색함 때문에 말조차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누구보다 반가운 내 마음은 또 설레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시원씨.”
“안녕하세요, 려욱씨.”
그대로 팔을 벌려보이는 시원이에게 뛰어가 안겼다.
이번은 친구가 아니라 애인으로 시작하자. 달콤한 목소리에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쑥스럽다. 피식 웃고서 고개를 숙였는데 시원이가 키를 맞춰왔다. 의아함에 가만히 있다가 부딪힌 입술에 눈을 감았다.
겨울바람은 여전히 추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혼자서 추워할 일을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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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안녕하세요, 하느님 (부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번외 : 1학년 수련회 날,
“1학년 1반 집!!!합!!!!”
선생님의 고함에 성민이와 나는 흠칫- 하면서 서 있었다. 이미 선생님 앞에 서 있었던 우리로서는 아이들이 빨리 오기만을 바랬다. 뭐 그리 할 얘기가 많은지 실실 쪼개면서 천천히 걸어오는 아이들과 뒤섞여
3월의 말과 4월의 초에 걸친 수련회의 첫날밤은 다음날인 만우절을 위해서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는(혹은 고약한) 장난을 칠지 궁리하고 있었다. 여자애들 방에 가보자느니, 소리를 질러 보자느니, 고백 쇼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느니 꿍얼꿍얼 대는 아이들 옆에서(이럴 때 꼭 하나가 되기 때문에 나와 성민이도 같은 방인 시원이네와 어울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뛰쳐나가는 아이들 때문에 눈이 퍼뜩 떠졌다. 어이가 없어 고개만 홱홱 돌리면서 애들을 쳐다보는데 성민이가 내 팔을 휙 잡아 끌어올리는 바람에 팔이 뽑혀나가는 줄 알았다. 하필 그 많은 장난 중에 고른 것은 고백 타임이라나. 어쨌든 평소 반에서 개그맨 수준인 은혁이를 데리고 장난을 치자는 것이 요지였다. 아무 여자애든 데리고 그에게 고백을 시켜서 반응을 살펴보자는 유치한 장난에 빠지고 싶었지만 이러나 저러나 똑같으니까 가자(사실 궁금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민이를 따라나서고 말았다.
“일어나면서 정신! 앉으면서 통일!! 실시!!!!!!!!”
그럼 그렇지. 좋은 결과가 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하필 교관한테 우리가 있다는 것을 들킬 건 다 뭐람. 여자애들과 함께 있던 것을 안 교관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린 결국 그날 밤 달밤에 훈련을 받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의 우정을 다져야만 했다.
**
“같, 같…이 가… 서…서, 섬…미나….“
고등학교에 와서 첫 훈련은 만만하질 않았다. 첫째 날 여자애들을 제외하고 강당에서 땀이 바닥을 적시도록 극기훈련을 받은 결과는 다음날 고스란히 나타났다. 더군다나 잠까지 안 잤으니 피로는 배가 되었다. 그럼에도 산행은 강행되었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어디서 욕하구 난리야!! 내가 욕하지 말랬지!”
“우씨… 자기는 욕 써도 되고. 왜 난 안 돼?!”
“하지 말라면 하지마! 했담 봐~. 주먹에 죽는 거야~.”
어우, 저 핏줄선 주먹. 저게 친구를 향한 주먹이야? 아주 날 잡아 먹으려고 드는구만. 가뜩이나 더워서 짜증이 늘어나 그런 성민이를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물론 곧 여자애들만큼이나 뒤쳐져서 바로 후회하게 되긴 했지만. 성민이는 이제 내 손목을 잡고 올라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서 인지 날 이끌어줘서 인지 흐르는 땀에 난 곧 무안하고 미안해서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고집을 피우며 잡아대는 통에 곧 포기하고 따라갔다.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올라가는 중에 샘을 발견하고 성민이랑 뛰어갔다. 그늘에 있는 샘에는 우리 반 남자애들 대부분이 몰려 있었고 그 중에는 시원이도 있었다. 물을 마시고 앉아서 땀을 식히려는데 성민이가 가자고 성화를 피우는 바람에 얼마 있지 않고 나섰다. 정상을 얼마 앞두지 않고서 더 힘들어지자 성민이도 나도 아무 말없이 산만 올랐다. 정상에 올라설 때도 손목을 놓지 않던 성민이는 정상에 도착하자 마자 날 껴안고 손잡고 뱅뱅 돌기 따위를 하면서 난리를 쳤다. 바람을 만끽하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는데 돌계단을 오르는 시원이와 눈이 마주쳤다. 힘내!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포즈를 취했더니 시원이는 나를 향해 잠시 웃으면서 똑같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곧 뒤에 따라오는 은혁이 덕에 시원이가 한 소리 듣긴 했고, 난 성민이가 뒤에서 덮치는 바람에 난간을 꽉 붙잡아야만 했지만.
**
2박 3일의 수련회의 마지막 밤에 우리학교는 장기자랑을 했다. 전교생이 모일 수 있는 강당의 앞에 아이들이 나란히 줄지어 앉아있었다. 곧 장기자랑이 시작하자마자 아이들이 앞으로 종기종기 모이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갔다. 성민이는 그새 내 뒤에 나타나 날 놀래키더니 곧 내 등을 배게 삼았는지 머리를 대고서 잠을 청했다.
오늘 하루 주먹으로 날 갖고 놀더니 이젠 등까지. 지독하다, 지독해. 하여튼
아니, 생각해보니 원래 성질이 더러웠어. 해달라는 데로 안 해 주면 맨날 주먹 들이밀고, 중학교 때는 내가 계속 집에 데려다 주고(방향도 반대면서!!!).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이사를 하며 같은 방향이 됐으니 망정이지, 자율학습 끝나고도 데려다 줄 거 생각하니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네. 화통을 삶아먹고도 그보다 크지 않을 목소리로 강당이 떠나가도록 질러대는 여자애들 목소리에 손바닥으로 귀를 살포시 막았다. 누가 올라오길래 저러나, 했는데 익숙한 얼굴에 깜짝 놀랬다.
“She’s gone- out of my life…. I was wrong-“
…… 여자아이의 노랫말이 시작함과 동시에 아이들이 잠시 조용해지다 이내 또 볼륨이 올라간다. 근데 여기서 She’s Gone이라니…. 좀 아니지 않나? 어이가 없어 계속 보고 있는데 귀가 아프다. 여자애라서 잘 올라가긴 하는데 좀 괴롭다. 1절이 끝나고 이 상황에서 잠을 자는
난 그렇게
**
캠프 파이어는 반 아이들과 어울릴 겸 추운데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같이 했다. 하다보니 더워져서 떨지 않게 되긴 했지만. 예정된 코스처럼 아이들과 손 잡고 불 주위도 돌고 그룹끼리 놀다가 연례행사처럼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으레 여자애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줄 알았더니 같이 모여있는 남자애들이 울고 있어서 깜짝 놀랬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보고 있자니 성민이 킥킥거리면서 애들을 한 명씩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다 멈춘 손가락에 같이 시선이 멈췄는데
나와 성민이는 하늘의 별을 보면서 잠시 서 있었다. 서울과는 달리 너무 선명하게 빛나는 별에 성민이가 ‘우리 나중에 여기서 둘이서 살자-‘하는 말에 무심코 ‘응’이라고 대답했다가 이내 ‘야!!!’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갑작스레 이어지는 뺨에 닿은 차갑고 말랑한 느낌에 나는 달밤에
“5분 후에 버스 출발한다!!!!!!!!!!!!!!!!!!!!!!!”
담임 선생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움찔한 나는 버스에 오르려다 내 옷을 잡아채는 여린 손길에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반인 여자애가 카메라를 들고 수줍게 서 있었다. 뭐야?- 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멀리
돌아가면서도 이어진 시원이의 노랫소리를 나와 성민이는 각자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서 잠을 청함으로 무시했다. 버스 앞자리 쪽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시원이의 눈길이 어쩐지 내 쪽을 보는 듯 했지만 앞자리에 예쁜 여학생이 있는가 보다 하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이 들었던 나는 일어났을 때 내 머리가 성민이 어깨에 뉘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덕분에 돌아가는 길에 성민이의 짐을 몇 개 들어줘야 했고, 내가
**
(덧붙이기)
“으흐흐흐흐흐흐-“
“누나, 제발 그렇게 웃지 좀 마. 누가 누나를 보고 시집간다고 생각하겠어? 장가라면 몰라. 것도 한 10살쯤 어린 마누라 얻는 중년 아저씨 같아. 어?”
“어허!
“진짜 신랑이 불쌍해….”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시현의 옆에 선 시원이 정말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발끈한 시현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 재빨리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라며 궁색한 변명을 해보지만 진심을 숨기긴 힘들어 보인다.
“시원아…. 누나…. 헤헤, 안녕하세요.”
살짝 문을 열면서 고개를 빼꼼이 내 비치는 려욱의 얼굴에 두 사람의 표정, 특히 시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진다. 비슷한 얼굴의 두 사람이(비록 시현은 화장을 했다지만) 자신을 향해 급방긋하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듯 려욱이 잠시 주춤한다. 려욱의 표정 변화를 금새 알아챈 시현이 시원의 옆구리를 퍽, 때리자 반사적으로 시원이 려욱에게 달려가 대기실을 나가 버렸다.
“저…저… 애미, 애비도 모를 자식…….”
물론 시현의 뒤늦은 분개심에 가득 찬 말은 듣지 못 하고.
“어머~. 성민이 왔구나. 호호호. 언니! 너무 오랜만이다. 형부도 안녕하셨어요.”
“처제,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벌써 시현이가 시집갈 나이가 됐구만. 시간 참 빠르이.”
“어머니, 아버지. 저 잠시 친구들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성민은 시원의 부모님과 자신의 부모님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려욱과 시원이 이야기 하는 쪽으로 걸어왔다.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둘을 보던 성민은 불만스러운 듯 말을 내뱉었다.
“
“에이-. 성민아, 왜 그래…. 오늘 좋은 날이잖아.”
“넌 가만있어. 김려욱 너도 똑같아. 애인이 남동생 구실을 제대로 하도록- 읍! 이어아(이거 놔)!!! 애 아으어야(왜 막는 거야)!!”
한창 말을 퍼부으려던 성민의 입을 틀어막은 시원의 왼손에 반지가 끼여있다. 버둥거리는 성민을 붙잡고 있는데 멀리서 규현과 은혁이 걸어왔다.
“
‘키’ 얘기에 갑자기 성민의 버둥거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시원이 의아해하며 그를 풀어주자 가만히 씩씩거리던 성민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은혁에게 달려들었다. 조목조목 따지며 딴에는 달려드는 성민을 피해서 은혁이 예식장 밖으로 나가자 성민이 질세라 쫓아갔다. 겨우 조용해지자 규현이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기범이는 신랑 대기실에 있나 봐?”
“응. 많이 긴장하는 모양이더라구.”
“하긴, 뭐…. 난 솔직히 희철이 형이 결혼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못 했어. 성질이 보통 성질이냐-.”
세 사람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시현과 사귄다(그것도 고등학교 내내)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절할 듯 놀랬지만, 그래야 상황이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수긍할 수 있었다. 여자에겐 전혀 관심 없는 척,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너스레(혹은 심각한 고민)를 떨던 사람이 이렇게 판을 뒤집은 듯 다른 사람이 됐으니.
부케를 받은 성민이 생긋거리며 웃는 동안 은혁은 옆에서 못 견뎌 했지만 기범이 다독여 주는 덕에 그나마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성민의 수작인지 시현이 입장할 때부터 부케를 탐내더니 기어코 제가 차지한 것이다. 려욱은 그런 성민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앞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만히 있는 손을 감싸오는 큰 손에 옆을 올려다 보았다. 시원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모습에 어이없는 듯 바라보다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반지 뺐어?”
“…어? …아, 아니… 그게…….”
웃고 있는데 살며시 들려오는 시원의 목소리에 동요를 감추지 못 했다. 움찔하며 자신에게서 빼내려는 손을 강압적으로 깍지 껴 쥐어오는 시원의 손가락에 려욱은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초점 맞춰야 됩니다!!”
“아, 아, 네….”
“앞으로 빼지마. 무슨 일 있어도. 한 번만 더 그러면 나 정말 돌아버릴지도 몰라.”
너 돌아버린 모습은 이미 저번에 봤는걸, 뭐…. 핀잔 주려다 이젠 허리께에 손을 얹고 자신을 노려보는 사진 기사 때문에 다시 밝게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었다. 곧 플래시가 몇 번 터지고 사람들이 식장 곳곳으로 흩어졌다. 식장 바깥으로 걸어나오면서 정말 기분이 상했는지 밝지 못한 시원의 표정에 시원의 팔을 슬며시 붙잡으며 올려다 보았다.
“알았어. 앞으로 안 뺄게. 너 계속 화내면, 나 삐진다? 응? 화 풀어~.”
“…빼지마. 나 진짜 농담 아냐.”
“우뤠에에에엑~~~~.”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성민이 목을 조르며 토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규현이나 기범은 킥킥 거리며 둘을 바라보고 있었고, 은혁은 성민의 옆에서 잠자코 부케를 들고 서 있었다. 아마 몇 대 맞은 모양인지 상태가 좋지 않다.
“야! 너 이거! 잘 간수해. 나중에 나 결혼할 때 내 마누라가 할 거니까.”
은혁에게서 거칠게 제 손으로 옮긴 부케를 려욱에게 던진 성민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얼떨결에 받은 부케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시원과 려욱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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