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올리는 것도 의외로 중노동임을 깨닫는 하루입니다.ㅜ.ㅜ
삭제할 때도 힘들고 올리는 것도 힘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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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전철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많다. 일본이라고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도 없네. 그런데도 괜히 실실 웃게 된다. 고개를 슬쩍슬쩍 돌리면서 주변을 구경하는데 누군가가 등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왜 때려요!! 깜짝이야!”
“아주 용감무쌍하다, 김려욱. 한국어가 술술 나오네.”
“우리나라 말 내가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래?! 흥!”
“그러니까~ 이쪽은~….”
안내서를 펼치며 미간을 찌푸리는 선생님을 보아하니 차라리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묻는 쪽이 빠르겠다. 가이드 대신 날 데려왔다는 고백에서 선생님은 자기가 바라는 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네, 싶었다. 옆에서 치근덕 거리는 너구리를 무시하고 기범이를 보니 별 흥미 없는 표정이다. 난 비행기 뜰 때부터 막 설레 했는데, 역시 너무 비교돼….
열흘로 일정을 잡고서, 일본 전체를 열차를 타면서 여행할 계획인 이번 여행은 꽤나 하루하루 일정이 빡빡하다. 마지막 목적지가 홋카이도니까…. 그렇지만 벌써 도쿄까지 왔으니까…. 엊그제 도착한 것 같은데 벌써 도쿄라니, 뭔가 기분이 복잡하네. 빛이 번쩍번쩍 하는 밤거리를 걷고 있으려니 서울과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간판만 일본어인 것 같다.
멍하니 걷다가 여러 명과 부딪혔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걸었을 뿐인데 상대방이 더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꽤나 곤욕스럽다.
“어……?”
“…….”
갑자기 손을 잡아오는 덕에 놀랐다. 낯선 나라의 익숙한 거리에서 조금은 생소한 스킨십이지만 마음이 편해진다. 남들에게 안 부딪히려 애쓰느라 곤두섰던 신경이 기범이를 통해 편해진다는 건- 꽤 놀라운 경험이랄까. 의지가 된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분명 내가 기범이를 더 챙기고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이런 모습에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위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진다. 결국 우린 서로를 위하는 것 뿐이니까….
**
할머니가 불교시기 때문에 종종 절에 갔었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 물론 부모님이 천주교셨기 때문에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종종 부모님과 할머니께서 싸우시는 걸 보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성당만 나갔던 터라 일본의 절…(이 아니라 신사라던가? 잘 모르겠는데.)에는 처음 와본다. 왠지 절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면 할머니가 화내시겠지?
굳이 신사의 의식을 할 필요는 없어서 구경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나무로 작게 잘려진 패들이 잔뜩 걸려져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점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몇 마디 말을 붙여왔는데 짧게 일본인이 아니라고 영어로 말하니 곧 입을 다문다. 일본어로 빼곡히 적힌 패들 사이에서 한국어, 중국어, 영어들이 보였다. 신기한 듯 보고 있는데 어깨에 올려진 손에 뒤돌아 보니 기범이다.
“하고 싶어?”
“어?! 아, 아니… 괘, 괜찮아!!”
흠, 하더니 점원과 얘기를 한다. 헉. 너 일본어도 할 줄 아는 거야?! 뻥져서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손에 쥐어지는 나무조각.
“소원을 적어서 걸어. 이루어 진대.”
“고, 고마워….”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마디가 생각났다. 아마 이 말이라면 선생님도, 기범이도, 너구리도 못 알아 보겠지? 뭐냐고 물으면서 재촉할 너구리나 궁금해할 기범이를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즐겁다. 둘을 놀리는 건 꽤나 재밌으니까. 비치된 붓펜으로 슥슥 써서 빈자리에 걸었다.
“디오…그라…티스…?”
“헤헤. 잘 썼다. 가자-.”
“무슨 뜻이야?”
“…이거 진짜진짜 비밀인데 너한테만 가르쳐줄게. 저 말을 마음 속으로 깊-이 새기고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백 번 쓰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대. 쉽지?”
“…정말…?”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해봐. 혹시 알아? 이루어질지.”
순진하게 몇 번 그 말을 중얼거리는 기범이를 보고 있으려니 당분간은 비밀로 해도 되겠지? 다 외웠다며 발그레한 얼굴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네…? 저렇게 열심히 외우다니…. 뭔가 섭섭한데…….
그런 생각을 채 끝맺기도 전에 멀리서 부르는 선생님과 너구리의 소리(…고함?)에 뛰어갔다.
**
온천에 몸을 푹- 담그고 있으려니 정신이 헤롱헤롱하다. 열흘이나 일본에서 보냈던 생각을 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신칸센을 타면서도 입을 헤벌레- 벌리고 창 밖을 바라봤었다. 그 모습에 또 너구리는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래도 어쩌라구. 신칸센 너머로 스쳐지는 풍경이 너무… 생소하기도 하고 친숙하기도 하고. 머리 위에 접은 수건을 놓고서 물 속으로 꼬르륵 소리를 내며 얼굴을 담갔다.
“누구?!”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원숭이 한 마리가 끼-끼- 하면서 쳐다본다. 괜히 놀랬네….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첨벙거리는 물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기범이가 어느새 옆에 앉았다.
“안 잤어…?”
“너랑 나 같은 방인데.”
그, 그랬지….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바위 쪽으로 몸을 기대고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다. 아, 그래서 딱히 밝지 않은 노천탕인데도 밝게 느껴졌었나…? 서울에서 보기 힘든 별들에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웠어?”
“어? 응!! 진짜 좋았어. 엄청 신기했어!! 외국 여행은 이번이 첨이거든!! 중학교 때 제주도로 수학 여행 간 거 빼곤 비행기도 두 번째 타보는 거였는데 너무너무 신기했어!!”
“그래 보였어….”
“응?”
“비행기 뜰 때 계속 바깥 보면서 웃었잖아.”
“누, 누가…. 씨… 그래, 나 비행기 너무너무 신기해서 좀 들떴다!! 넌 어차피 많이 타봤으니까 상관없겠지만!!”
“처음이야.”
“어?”
“비행기 탄 거, 처음이야.”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실어증과 대인 기피증에…』
뭐라 대꾸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말문이 막혀서 기범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다가오는 기범이 얼굴에 가만히 있었다. 맞물려오는 입술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지만 바위 때문에 그대로 키스를 받아냈다.
“기, 기범아…….”
“다 처음이야.”
다시 맞춰오는 입맞춤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런 입맞춤은 처음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벌려진 입으로 혀를 감아 올리는 기범이 덕에 정신이 하얘진다. 나도 모르게 기범이의 목에 팔을 두르자 더 깊게 눌러오는 기범이의 몸이 느껴졌다.
“어, 어지러…….”
“…김려욱…….”
여전히 몸은 온천에 담겨진 채 기범이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발목을 잡아 올렸다. 키스의 열기도 잊고 쳐다보는데 갑자기 발등 위로 입을 맞추는 덕에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뭐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피식 웃는 기범이.
“여기부터.”
“?”
갑자기 머리 위에 얹어지는 손가락에 영문을 모른 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다 내 꺼야.”
“무, 뭐?! 야!!
한 소리 하려는데 이번엔 프렌치가 아니라 딥이다. 개기범 이 자식,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너 입만 떼면 내가 물을 거야?! 대답 못 하며 너 죽어?!!! 근데 입을 안 떼…. 어뜩해……. 물 사이로 느껴지는 기범이의 손가락이 유두와 페니스를 지분댔다. 세 군데를 동시에 공격하냐…. 개기범 이 손 빠른 놈……. 너 선수지…?
“기, 기범아…. 나, 나, 나으…….”
이게 내 목소리 맞단 말입니까, 하느님 아부지!!! 목 근처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기범이 덕에 정신이 이젠 어떻게 되도 모르겠다. 내 손으로 할 때보다 훨씬 더 죽여…. 헉헉 대며 고개를 쳐드니 여전히 별은 밝다. 이 훤한 보름달 뜬 데서 이게 무슨 짓…….
“아, 흡, 그, 야!! 어, 어디 손가락 넣, 아! 아파, 아파!!”
“힘, 빼…….”
“아, 아으, 아, 아프…으….”
눈물이 절로 난다. 게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구나…. 기범이 어깨를 붙잡고 애원하는데도 들은 척도 않고 이젠 손가락으로 갖고 논다. 덕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힘도 같이 빠졌다. 이제 끝인가 싶어서 숨을 고르려는데 허리를 잡아 당기는 기범이의 손에 끌려간 허리 끝으로 뭉툭한 것이 느껴졌다.
“흐…으ㅡ…아, 아…!!!!”
“…려욱아…….”
단숨에 치고 들어오는 것에 숨도 못 쉬고 끅끅 거리며 기범이의 목에 매달렸다. 온 힘을 다해 팔로 감싸 안았다. 정신이 핑- 돌 것 같다.
“뜨거워……. 온천보다…….”
“아, 아으, 으, 그, 으, 러… 말, 읏, 하, 지…… 아, 아…….”
이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게 돼 버렸다. 이리저리 휘젓던 기범이의 페니스가 어느 한 곳에 닿자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가며 신음소리를 질렀다. 알겠다는 듯 키득거리는 기범이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 후에 계속 그곳만 찔러오는 통에 나는 기분이 좋은 건지 울고 싶은 건지 계속 매달리다가 나중에는 내가 먼저 기범이를 리드하기도 했다. 미쳤어, 김려욱…….
김려욱 17세, 파출부로 돌보던 어린이에게 순결을 고이고이 빼앗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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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잡지를 넘기던 너구리가 포크에 사과를 푹, 찍어서 먹다가 드라마를 보면서 웃는다. 한 가지만 해라, 인간아!! 넌 집중력이 그렇게 좋냐?! 한 가지만 하라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지독하게 들어온 터라 너구리를 아니꼽게 바라봤다. 계속 TV를 보면서 사과 접시를 포크로 쨍쨍 부딪히는 꼬라지를 보려니 한숨이 난다.
“깍고 있잖아요!! 도대체 혼자서 사과 몇 개를 먹는 거예요?! 그리고 왜 맨날 여기서 밥 먹어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어.”
어쩜 저렇게 단언한데……. ‘요새 어머니가 가게 한다고 좀 바쁘거든.’- 이라는 한마디로 남은 방학을 여유롭게 보내려는 이 조용한 집에 얹혀 사려는 게 부끄럽지 않냐!! 사실 그 날 이후로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하긴, 잠 한 번 같이 잤다고 사귄다는 생각도 좀 웃기는 얘기고…. 단지 이젠 기범이의 침대 옆 바닥이 아니라 침대 옆 자리에서 잔다는 것 정도? 덕분에 스트레스를 받아선지 요즈음 이 가는 버릇이 심해진 것 같아서 마우스 피스를 끼고 잔다. 기범이는 조용히 자는데 (선생님 표현으론 시체 같다고 했다.) 내가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서 이 가는 버릇을 고치려고….
“너 아프냐?”
“아, 아뇨….”
“……나하고 있을 때 딴 놈 생각 하지마.”
“에?”
“기분 나쁘니까 딴 생각도 하지마.”
“뭐…. 내가 왜 다른 생각 하면 안 돼요?! 왜 남의 생각까지 간섭하려고 해요? 진짜 어이없네.”
툴툴거리면서 입을 삐죽이다 사과를 다시 깍았다. 조각 내서 접시에 담고 테이블에 올려놓고 남은 씨와 껍질을 바구니에 칼과 담아서 일어서려는데 너구리가 팔을 잡는 덕에 멈칫했다.
“뭐예요? 사과 다 깍아 줬잖아요.”
“……내가 너 사면, 너 나만 생각해 줄 거냐?”
“?! 무슨 말이죠……?”
“내가 너 내 파출부로 고용하면 나만 생각해주고 나만 위해줄 거냐고.”
“…이봐요,
“얼마야. 얼마면 되겠어. 얼마면 만족하겠어.”
갑자기 일어나서 눈을 맞춰오는 덕에 움찔했다. 대사는 원빈인 주제에 이렇게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는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널 얼마나 갖고 싶어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 그만해요……. 이런 모습 형답지 않아요….”
“- 뭐가 나다운데?”
“네, 에?! 가, 갑자기 이런… 얘기… 서, 설득력도 업, 없고….”
좋은 대꾸를 찾지 못 하고 계속 머리만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쇼파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영운이 형….
“됐다. 내가 애 데리고 뭔 짓을 하겠냐. 가 봐. 할 일 해.”
“윽… 또 나 놀린 거죠!!!”
분해하며 쳐다보는데 픽- 코웃음을 치더니 TV로 시선을 돌린다. 리모컨을 쥐고서 띡-띡- 채널을 변경하는 모습을 보다가 홱 돌아섰다. 역시 그렇지, 저
“…….”
“기, 기범아…. 어, 언제 나왔어?”
사, 살벌하다…. 분명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왜 추궁하는 기분이 드는 거지? 혹시 아까 전에 키스하는 것도 봤어? 묻고 싶은데 어느새 등을 돌려서 냉장고로 가버린다. 화, 화났나….
그러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주제에 왜 그래? 막말로 내가 너구리랑 키스를 하든 몸을 섞든
**
책상에 푹 엎어져서 눈을 감으려는데 어깨를 흔드는 손에 최대한 눈에 힘을 빡! 주고 노려봤다. 뭐냐는 듯 비웃음을 날린 규현이가 또 앞자리에 앉자 아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개학하고 10월이 됐다. 한달 내내 나와 기범이는 같은 침대에서 자지만 아무런 일도 없이 아주 조용~하고 평탄~한 나날을 보냈다. 나는 기범이 때문에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기범이는 여전히 멀쩡하다. – 기분 나쁜 건 너구리와 키스 이후로 기범이가 하는 말이 아주 극극극극소량이 됐다. 일본에선 내 몸이 더 뜨겁다느니 어쩌다느니 말도 지껄인 주제에.
…하지마! 하지마! 그 때 생각 하지 마!!
“이게 미쳤나-.”
머리를 쥐어뜯는데 베프라는 친구 놈이 턱을 책상에 괴고 바라보며 하는 말꼬라지하곤….
“근데 너
“-?! 뭐?!”
“아아니~. 요새 왠지 분위기가 싸아~한 것 같아서으~. 왠지… 전의 분위기는 한쌍의 바퀴벌레 같았다면, 지금은 부부싸움하는 노부부 같은 분위기랄까?”
“너지! 우리 둘이 이상한 소문 내는 거!! 너 베프를 커밍아웃 시키고 싶은 거야!”
“내가 뭘?! 나 소문 안 냈어!! 그냥
“죽어버려!!!!”
이젠 쪼규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애들이 달려와서 뜯어말릴 때까지 규현이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기범이가 매점에 가버린 탓에 탈없이 넘기나 했더니 집으로 가는 길에 발모제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해줘야만 했다. 덕화 아저씨가 광고하는 걸로 꼭 사줘야 된다며 강요하는 규현이를 보며 기범이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지만 얼버무려 버렸다.
**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왠 여자 구두가 놓여있다. 옆엔 왠 남자 구두도 있네. 누구지? – 기범이와 같이 들어섰다. 쇼파에 앉아있던 여자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윽. 왠 드라마에 나올 법한 아줌마다. 게다가 옆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다. 남을 깔보는 게 생활의 일상화가 된 눈꺼풀이잖아. 반쯤 치켜 올린 눈꺼풀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이 불쾌하다. 여전히 거리를 두고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네가 기범이 파출부구나? 누군가 했더니…. 꽤 귀염상이네.”
네네, 그치만 아줌마한테 이쁨 받고 싶은 생각은 저언혀어 안 드네요. 괜히 드는 거부감에 굳어버린 무표정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웃어야 한다고 난 분명 수십번 연습해 왔는데. 어쨌든 칭찬을 들었으니 웃으며 아부를 떨어야 한다.
어라…. 그런데 이 아줌마 떨고 있다. 겨우 커피잔을 내려놓긴 했지만 입꼬리도 영 부자연스러운 게, 좀 이상하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
“어머. 오랜만이구나, 기범아? 요즘은 자살 안 하니? 통 들리는 소식이 없더구나. 한 달에 한번은 꼭 자살시도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 많이 나아진 모양이네?”
뭐, 뭐야…….
“네 자살 얘기 하는 게 부띠끄 애들과 수다 떠는 낙이었는데. 뭐하니? 어서 앉지 않고?”
“아, 저…….”
“영운이가 말을 한다고 해서 와봤더니 그 애가 헛소리를 들은 모양이네. 어쩜 변하질 않았어. 내 눈엔 초등학생 때 그대로인 것 같은데 말야. 약은 꼬박꼬박 챙겨먹지? 이봐요, 파출부. 저 애 약 제때 안 주면 발작할지도 모르니까, 만약 안 먹였으면 말해요. 정신병자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소름 돋아 죽겠어.”
“저기, 말씀이 심하신 것 같은데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남의 집에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예요. 그리고 기범이 많이 좋아졌어요. 왜 정신병자 취급을 하세요?!”
“뭐~?! 나 쟤 엄마야. 엄마가 아들 보러 오는 게 잘못이야? 그리고 정신병자더러 정신병자라고 하지 누구보고 정신병자라고 해?!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너 그만둬. 지금 당장!! 어차피 돈이 목적일 텐데 그깟 돈, 챙겨줄 테니까 당장 나가!!”
“……-….”
“?!”
슬슬 여자의 말에 짜증이 나려다 기범이의 어머니란 말에 흠칫했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새어머니인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영운이 형과는 너무 다르다. 느낌이…. 갑작스런 해고 통보에 할말을 잃고 서 있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갑자기 날카로워진 눈빛에 불안감이 든다. 현관 쪽에 서서 가만히 있던 기범이가 부엌으로 들어간다. – 저번 일이 생각났다. 말리려고 돌아섰는데 벌써 달려온 기범이가 칼을 그대로 내리 꽂는 것이 경호원에 의해 막혔다.
“흐, 흥……. 그럼 그렇지…. 이 미친 놈이 제정신이 될 리가 없지……. 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내가 바로 격리소에 넣어버릴 거야!!”
“……!!!!!!”
얼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두 팔이 잡힌 기범이는 여자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며 몸부림을 쳤지만 쉽지 않았다. 여자는 나를 한 번 노려보더니 밖으로 재빠르게 나가 버렸다. 경호원이 기범이의 목 뒷 부분을 한 번 치자 눈을 감으며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경호원이 나갔다. 소파에 뉘여진 기범이를 끌어 안았다.
천주님, 제발 이 아이가 그만 아프게 해 주세요…. 눈을 감은 기범이의 피부가 너무 창백해 무서움에 그 후로 몇 시간을 울기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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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소파에 앉아서 기범이의 눈치를 살피던 영운이 형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서,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럴 줄은 몰랐지…. 아버지도 행패 부리거나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길래 나는 설마하니…! 아, 암튼 진짜 미안해. 미안. 아유- 입방정 진짜. 기범아, 진짜 형이 잘못했다….”
“…….”
“누나 성격 알면서 상황에 휩쓸리냐…….
커피를 마시며 선생님이 타박 주듯 말했다. 일인용 소파에 앉은 영운이 형은 더욱 눈치를 보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소파 끝에 앉아서 바로 옆의 선생님의 반응 말고는 기범이의 얼굴을 보려면 힘이 들기도 했고, 보고 싶지도 않아서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기범이 사과 안 받아 줄 거야? 영운이 무안하겠다.”
“…….”
“이참에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쨌든 누나는 네가 정상이 될 까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니까. 겁쟁이라니까. 기범이는 후계자 자리, 영운이랑 경쟁할 생각 있어?”
“없어.”
“이런, 단칼에 거절해 버리네.”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후계자란 말에 귀가 쫑긋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내 반응에만 너구리가 뭐냐는 듯 쳐다볼 뿐 선생님은 무신경하게 커피를 계속 마셨다.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채 멍하니 앉아있던 기범이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젠장…. 이래선 평생 오해한 상태로 살 거야…….
“그런데 려욱인 왜 일부러 선생님을 여기에 앉혔니?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불편해. 기범이가 지금 날 살기로 압도하려고 하는데. 네가 없었으면 벌써 칼부림 났을 거야.”
“네, 에?! 아, 하, 하지만 기, 기범이도 그, 서, 선생님이랑 안, 앉는 걸 더, 더 조, 좋아할 것 같, 아서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셔, 꼬맹아.”
“거, 거짓말 아니예요!!!”
“뭐, 아무튼.”
선생님이 일어서고 너구리도 곧 일어났다.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을 올려다보니 또 생긋 웃으셨지만, 마치 ‘힘들었어.’라고 압박을 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버, 벌써 가시게요?!”
“내일 출근 해야지.”
“아, 아, 네…….”
그야말로 물음표가 선생님 주위에서 춤추는 듯한 포스가 느껴진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쪽 입꼬리만 살짝 올린 웃음을 지은 선생님은 곧 뒤돌아 현관으로 걸어갔다. 선생님과 너구리가 나가고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곧 차에 시동이 걸렸고 너구리가 타려다 말고 손짓을 하기에 다가갔다.
“?!”
당황하는 것도 잠시, 뒷머리를 잡아당겨 밀어부치는 키스에 너구리의 어깨를 때려댔지만 손목만 아프도록 잡혔다. 기범이가 보고 있을 텐데…!!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니 빤히 쳐다보는 기범이 시선에 눈을 질끈 감았다.
“뭐…!!!!!”
“사귀자. 진심이야.”
“네?”
“일주일 내로 대답해줘. 기다릴게.”
할 말만 하고 잽싸게 차를 타버리는
“무, 뭐… 뭘 봐!!!”
“…….”
그대로 방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내 베개를 휙 던지고는 문을 쾅, 닫는다. 어, 어이없어…….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안방 문을 여니 잠겨있다.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베개를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사람이 쓰지 않아 냉기가 가라앉은 방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
규현이가 턱을 괴고 내 이마를 팅- 하고 밀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달려들면서 소리를 꽤액하고 질렀을 텐데 이젠 움직이기도 싫다. 바로 책상 위에 팔을 두고 얼굴을 묻어버리니 무슨 일이냐며 손바닥을 얼굴 양 옆에 대는 규현이를 피해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요새 기범이 완전 캐싸늘이지 않냐?”
“…… 몰라. 걔 얘기 하지도 마.”
“오우- 왠 일이셔. 개기범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태평양이고 대서양이고 무조건 건널 듯이 굴 때는 언제고. 이야- 이래서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거지. 어떻게 손바닥 뒤집듯이 이렇게 태도가 바뀌냐?!”
“내가 언제!!!”
“둘이 싸웠냐?”
“뭐?!”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소꿉친구보다 더 찐한 우정을 과시하던…… 뭐, 네가 거의 시중드는 식이긴 했지만. 암튼 그랬는데 이렇게 확 싸늘해질 수가 있냔 말이지. 요즘엔 개기범이랑 점심, 저녁 쌩까고 집에 같이 가지도 않고 이동수업도 무조건 각자잖아. 이미 전교엔 너네가 깨졌단 소문이 파다~하지….”
이것들이 맨날 남의 뒤꽁무니만 좇나.
“내가 걔랑 사겼어? 깨지긴 또 뭐가 깨져. 암튼 앞으로 나 개기범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니까 말도 하지마.”
안 그래도 밤마다 늦게 열쇠로만 들어오고 밥도 제 때 안 먹고 말 한마디도 없는 생활로 돌아와서 짜증나 죽겠다구. 그래도 처음엔 밥은 제 때 먹으려고 애쓰더니 요샌 그것도 아니고.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란 말야, 이 나쁜 개기범아!!
**
차갑게 식은 밥과 반찬들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프다. 벌써 열 시인데, 아직도 안 들어온다. 이런 상태가 일주일쯤 됐으니 나도 포기해야 좋을 텐데- 아직도 다정했던 모습과 지금이 똑 같은 사람인지 믿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냥 짜증이 났는가 보네, 하며 넘기려고 했는데 이젠 짜증난다.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니냐구!!
열쇠 소리와 함께 전자음 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무심하게 뒤돌아서는 모습에 진저리가 났다.
“
“…….”
들어가려는 기범이를 돌려세워서 눈을 마주했다. 내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초점조차 없이 까맣다. 입술을 굳게 다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팔을 뿌리치려는 행동에 그만 이성을 잃어버렸다.
“너 나한테 화났니?!”
“…….”
“왜 말을 못 해?! 왜! 화 났으면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다! 말을 해 줘야 내가 알고 고칠 거 아냐!! 계속 그렇게 나 피하고, 말 안 하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하나님이니? 부처님이야?!”
“…….”
“네가 왜 화 내는지 난 전혀 모르는데 네가 피하기만 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 혹시… 내가 싫어진 거야? 그래서 나 피하는 거였어…?”
“…….”
긍정도 부정도 없는 침묵 속에 혼자서 흥분한다는 사실에 덜컥거리던 심장이 급작스레 가라앉았다.
“내가…… 싫어……?”
“…….”
기범이의 팔에서 천천히 손이 떨어졌다. 생각해보면 기범이는 이제까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다. 나 혼자서, 그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기대했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짓을 그에게 해 버렸다. 그건 결국, 그에겐… 상처였을까…….
“아… 미, 미안해…….”
갑자기 시야가 뿌얘져서 그가 어떤 표정인지 정확히 보지도 못 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나왔다. 11월의 추위가 파고 들었다. 그러나 마음이 누군가에게 쥐어 짜이는 듯한 아픔이 차가운 바람에 죄이는 피부보다 더 했다.
-… 생각보다 기범이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현실이 날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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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휴대폰은 계속해서 진동하며 연락을 받으라고 내게 명령했지만 무시하고 비를 맞으며 야경을 보고 있었다. 슬슬 추워지려는데 또 울리는 전화에 짜증이 나서 슬라이드를 밀었다.
[“김려욱, 너 어디야!!”]
“왜?”
[“너 지금 기범이가 찾고 난리 났는데 어디야!! 둘이 무슨 일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 일단 빨리 돌아가. 요새 기범이 성질 많이 죽긴 했는데 다시 돋굴 일 있냐?! ………뭐야…. 김려욱 너… 울어…?”]
“아, 안 울어……. 우, 울긴 누가 우냐….”
[“울먹이는 거 다 들려…. 기범이가 뭐라 그랬냐…?”]
“-……읍…규, 규혀나……. 나, 나 어떡해……. 기버미, 기버미가…… 흑…….”
[“일단 들어가. 지금 날씨도 춥잖아. 너 설마 밖은 아니겠지? 가을비가 얼마나 차가운데. 엄살도 심한 녀석이 어쩔 생각이야.”]
“내가 뭐… 바보야? 당연히 따뜻한 데 있지….”
[“너 미련하잖아. 맨날 미련한 짓 잘 하니까 그러지. …아무튼 들어가서 둘이 해결 봐. 이번 달 월급은 제대로 받았겠지? 뭐, 돈 문제는 확실한 곳이니까….”]
“어…?”
규현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서 다시 물으려는데 뒤에서 안아오는 손길에 멈칫했다. 통화를 끊고서도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래도 말 잘 한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기범이랑 있으면 바보가 된 기분이 자주 든다. 지금도 바보 같아. 또 울잖아.
“찾았다….”
“-…….”
“김려욱……. -…좋아해….”
“?!”
“네가 날 좋아하든 싫어하든… 좋아해……. 이번엔… 절대로- 절대로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내가, 지킬 거야…….”
“기범아…….”
몸을 돌려 마주 보니 비에 젖은 채 웃고 있는 기범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같이 웃었다가, 또 울었다가, 또 웃었다. 울면서 웃으면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이전 기범이를 이 곳에서 찾았을 때처럼 별이 보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보다 빛나는 기범이를 만났으니까…….
**
떨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냉기에 몸을 떨자 기범이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를 켰다. 욕실로 같이 들어와서 옷을 벗는데 갑자기 맞부딪히는 입술에 허리를 세면대에 기댔다. 차갑던 입술이 뜨거워질 때까지 쭉 입맞춤을 하다가 버클을 푸는 손에 급히 막았지만 소용 없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는 듯 하더니 다시 깊게 맞춰오는 키스에 기범이의 바지를 풀어 내렸다.
알몸이 된지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곧바로 서로의 페니스를 손으로 잡고 애무했다. 급하게 치고 들어오는 기범이의 것에 다행이 기절은 안 했지만 진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짧은 섹스의 여운을 접고 욕조에 앉아 물을 틀었다. 최대한 따뜻한 온도로 올린 욕조에 둘이 앉아 있으려니 좁다. 일주일도 안 되는 냉전기였지만 꽤나 피곤했던 터라 졸리움을 참지 못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욕조에서 벗어난 기범이가 입욕제를 욕조에 풀었다. 프로방스인가 뭐더라… 아무튼 마트에서 헐값에 팔길래 사왔는데 잘 안 쓰다가 이렇게 쓰네… 싶어서 기범이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또 같이 웃어 보인 기범이가 다시 일어났다.
“씻겨줄까…?”
“어, 어?!”
그대로 샤워볼에 바디워시로 가득 거픔을 내선 목 밑 부분을 마구 문질러 댄다. 너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났다. 욕조에 들어와 일으켜 세운 뒤 거품을 온 몸에 묻혀주는데 감동을 먹고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 으, 으?! 너, 너무 거기만 만지지 마…!! 헉!!”
“?!”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집요하게 만지랬어…?! 살짝 밀어낸다고 했는데 힘이 너무 강하게 실린 모양이다. 뒤로 넘어져 물을 뒤집어 쓰고서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지 눈만 끔벅 거리다가 씨익 웃고는 내 손을 잡아당겼다. 미안함에 무방비 상태로 있던 터라 쉽게 넘어졌다. 또 한 번 욕조의 물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서로를 보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웃었다.
서로의 입 안을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헤집다가 떨어졌다.
“여기 앉아봐.”
욕조 가장자리에 앉은 기범이가 순순히 앉았고 망설임 없이 오럴을 했다. 나름 중학교 때 이론은 다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상상보다 뭔가 무지막지 하다. 처음이라 제대로 하진 못 해서 간간히 기범이가 아픈 듯이 소리를 낸 것 빼면, 나름 성공적… 아, 아닌가?
입 안에 넣는 것이 슬슬 아플 때쯤 기범이가 나를 떼냈다. 그대로 욕조 끝으로 밀어 부침과 동시에 이어지는 충격에 소리를 삼켰다. 물이 차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의 움직이는 것과 같은 리듬의 소리를 냈다. 수증기 속에서 머릿 속이 어질해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탐했다.
**
카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고 뛰어오는 영운이 형의 모습을 보고서, 이 사람에게 내가 너무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것이 두려워졌다. 아마 내가 기범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웃고 우는 것처럼, 형도 그렇겠지….
“뭐 하러 벌써 나왔어? 기다리지 말고 뭐든 시키지. 뭐 마실래?”
“- 미안해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 확실히 잘라내야만 한다. 더 이상 받을 상처가 없도록.
“어……?”
“정말 죄송합니다.”
반가움을 띠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손은 내 손이 아닌 것만 같다. 이제 형이 날 피하게 된다 해도, -물론 그건 무척 슬프겠지만, 아마 형도 날 이해할 수 있을 테지….
“- 결국 기범이야?”
“예?!”
“너도, 결국 기범이구나….”
“저, 정말… 정말…….”
“그만 사과해. 듣기 싫다. 넌 미안하니, 죄송하니-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안 어울려. 소리 지르고, 화내고, 유치하게 말 싸움 하고 그런 게 너한테 더 어울려. ……울지 마…. 넌 눈물이 왜 그렇게 헤프냐…?”
“미안해요….”
“-… 나하고 있을 때 너 언제나 울상이었어. 맨날 기범이 걱정한다고 난 보이지도 않았지. 내가 어떤 표정으로 널 보는지 너 몰랐잖아. 그 관심 조금이라도 끌어오려고 했는데… 어렵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우냐? 보기 싫다. 안 그래도 못 생긴 얼굴 정 떨어지려고 그러네.”
“미안합니다…….”
“그건… 날 위한 거니까……. 지금 눈물은… 내 꺼 맞지…? 그런데 눈물보단 웃는 모습이 갖고 싶은데, 어렵겠지…?”
형은 끝까지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나마 기범이가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그 충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형을 싫어하진 않지만,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지만, 그랬기에 형에 대한 미안한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다….
나와 기범이가 행복해지는 길에, 영운이 형의 아픔이 바탕이 됐을 지도 모른다는 그 죄책감이- 아프다. 이런 생각을 안다면 형은 분명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평소처럼 대하는 그의 모습은 아마 한동안 날 괴롭게 할 것 같다….
아파트 앞에 멈춰선 형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또 씩 웃었다.
“너 기범이한테 섭섭한 일 생기면 언제든 나 불러라? 어쨌든 우리 동생 은인이니까, 난 너한테 평~생 빚진 기분으로 살 거다, 아마. 난 저대로 영영 기범이 잃은 줄 알았거든.”
“네…….”
“-… 한번만, 키스해도 돼…?”
“-아….”
그대로 형을 올려다 보았다. 어둠에 분명 잘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도, 형의 눈동자가 이토록 슬픈 것은 왜 일까. 다가오는 얼굴에 눈을 감으니 눈꺼풀에 살며시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느낌이 마음에 시리도록 와 닿았다.
- 그리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형이 더 이상 나를 마음에 두지 않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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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찰싹 붙어서 걷고 있는데 앞서 걷던 규현이가 뒤로 홱,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홱, 돌려서 씩씩 거리며 걸어간다. 콧김으로 구겨진 펫트 병 불면 1초 만에 빵빵해질 기세다.
“너네 둘, 떨어져, 떨어져!!!”
“무, 뭐야!! 왜 이래!!”
“흥, 기범이가 팔이 길면 날 넘어서 너한테 손을 뻗을 수 있겠지!!”
“…질투하냐?”
갑자기 몸을 돌려선 내 허리를 감싼 기범이 팔을 떼내더니 자기가 중간에 껴서 걷는다. 괜히 심술이야. 말을 안 하지만 아쉬워서 시무룩하게 걷고 있으려니 어느새 반대편 쪽으로 온 기범이가 다시금 팔을 허리에 감싼다.
“크아아아악!!!! 지금 솔로 앞에서 투쟁하는 거야 뭐야아아아!!!!!”
절규하며 소리지르는 규현이가 불쌍하긴 했지만, 규현이 옆 보다는 기범이 옆이 더 좋다. 하지만 계속 방해하는 바람에 미술실까지 규현이를 버려두고 기범이와 손잡고 뛰어갔더니 나중엔 정말로 규현이가 삐쳐 버렸다. 그렇다고 풀어주려고 노력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
담임 선생님을 도와서 시험지를 정리하다 보니 많이 늦은 시간이다. 물론 아이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가는 시간보다는 빠르지만, 집에서 기다릴 기범이를 생각하면 저절로 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부랴부랴 인사하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깜깜해졌다. 그러고 보니 봄에 기범이를 처음 만났는데,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다. 그 시간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혼자서 웃으며 교문 밖을 나왔다. 왠 깍두기들이 교문 앞에…. 누가 빚지고 학교에 들어왔나? 슬쩍 보고는 그냥 가려는데, 저번에 왔던 아줌마의 경호원이 끼여있다. 기범이는 집에 갔는데…?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같이 인사한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덩치들이 몰려온다. 이, 이건 뭐야아……. 영문을 모르고 쫄아서 있는데 아저씨가 다가왔다.
“김려욱님, 저랑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얘들아, 조심해서 모셔.”
“예!!”
빠져나갈 새도 없이 팔이 붙잡혀 까만 차에 태워졌다. 휴대폰을 빼앗아 배터리를 빼는 덕에 그제까지 진동하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소리도 없이 출발하는 자동차 속에서 이대로 원양선에 태워지거나 장기 매매로 팔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
“아저씨~. 월척 이예요!! 월척!! 기계를 준비해야겠어요오!!”
“오!! 하우 빅 잇 이즈!! 베리 나이쓰으 데이~!!”
……라는 대화를 상상하고 왔는데, 여긴 어느 회사 빌딩 같다. 아무래도 원양선은 아니고, 그럼 장기 매매인가?
“내 눈 시력 거의 0이고 저 지방도 별로 없고요!! 저 심장도 진짜 별로고요, 밥은 진짜 소화도 못 하거든요오오오오!!!”
“상관없다헤!! 장기!! 내놔라헤!!”
……칼이 없으니 그것도 아닌가? 것도 아님 여기서 두들겨서 살을 연하게 하겠단 건가? 바짝 굳어서 넓은 공간 안에서, 최대한 문 쪽에 붙었다. 여차하면 튀려고. 하지만 밖에는 깍두기들이 있단 말이야아….
달칵, 열리는 문에 반사적으로 홱 돌아본 바람에 목이 꺽였다. 아픔에 목을 붙잡고 어쩔 줄을 모르며 서 있었다. 문을 연 사람은 실크 느낌의 회색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는데, 갑자기 목을 돌린 내가 쩔쩔 매자 놀란 듯 쳐다보다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비서로 보이는 나이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문을 닫았다.
“이름이… 김려욱군, 맞는가?”
“에, 네? 마, 맞는데요….”
“앉게. 나 기범이 애비 되는 사람일세.”
그, 그럼 아버지?! 저번엔 어머니더니 이젠 아버지야?! 장기 매매나 원양선은 일단 아닌 모양…이구나. 하지만 더 쪼그라든 내 심장을 어떡하냔 말이다…. 억지로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선한 인상이다. 그러나 자연스레 소파에 기대는 모습에서 그가 어릴 때부터 도련님으로 자랐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기범이 때문에 늘 폐가 많네.”
“- 예?! 아, 아니예요!! 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해요!! 도, 돈도 많이 주시고… 학, 학비도 이번에, 대 주셨잖아요….”
“기범이랑 같은 나이의 아이가 고생한다는 게 난 늘 마음이 아파.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들었는데, 날 아버지처럼 생각하게. 생각이 나면 찾아오게나. 언제나 환영이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왠지 진실이 깃든 것 같다. 그가 한 대기업의 회장이라는 사실도 잊고 마음이 놓여서 활짝 웃었다. 어른들 앞에선 늘 긴장하고 눈치를 봤는데….
“오늘 경호원들을 시켜 자네를 데려온 걸 용서하게. 젊은이들이 늙은 사람 만나는 걸 달가워할 것 같지 않았지만, 꼭 자네를 만나보고 싶었거든. 만나고 나니 안심이네. 기범이가 이제 마음만 열게 된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정말 고마워.”
“아, 아니예요…. 그렇게까지…….”
왠지… 기범이랑 사귄다는 걸 알면……. 안 돼, 말하지 말자. 이렇게 좋은 분한테 실망시켜 드릴 순 없어. 밝혀지면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이런 분위기, 느낌… 계속 갖고 싶어…….
-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는 분이다….
그렇게 기범이 아버지를 만나고 아줌마의 경호원이 모는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곧 차가 시동을 걸었고, 가는 동안 창 밖을 보다가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직은 회장님이 널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아들로 놔둘지 몰라도 네가 정말 평범해지면 바로 버림 당할 거야.』
순간적으로 차창에서 몸을 떼며 흠칫 떨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경호원 아저씨가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지만 고개만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으신 분이 그런 일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이 멀어 꽤 오랜 시간을 차 속에서 쓸데없는 생각들을 해야만 했다.
**
문 앞에서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차분하게 벨을 누르니 열리는 문에 안으로 들어서니 예상대로 굳은 얼굴이 기다린다. 그런데 밥 냄새가 난다. 식탁 쪽을 보니 마른 반찬들이 나와있다.
“휴대폰도 안 받고, 걱정했잖아. 더 늦었으면 신고할 뻔했어.”
“어…. 그게…….”
“……
“에…?”
선생님이 나랑 같이 있었다니? 난 방금 전까지 기범이 아버지랑 있었는데…. 기범이가 아버지를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서 선생님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납득이 됐다. 식탁 의자를 잡고 서 있는데 기범이가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앉아. 찌개 끓일게.”
“- 아, 그래. 이거 네가 차린 거야? 우리 기범이 많이 컸네~?”
뒤돌아서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목덜미가 약간 붉은 것으로 봐선 쑥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기범이는 얼굴 대신 몸으로 자기 감정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아직 사람하고 말은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고.
“놀리지마.”
찌개를 갖다 놓고서 식탁에 마주 앉은 기범이가 손으로 얼굴 아래 쪽을 가리고선 고개를 돌렸다.
“아, 나 밥 혼자 먹어도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고마워…….”
“…언젠간 직접 끓여줄게…. 지금은 네 것 데워주는 정도지만.”
나한테 웃어준 것, 나한테 말해준 것, 좋아한다고 고백해 준 것, 나한테 마음 열어준 것… 기범아, 난 다 고마워. 널 만날 수 있어 기쁘고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뻐. 나중에 우리가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은 기뻐할래. 지금은 고마워할래.
『아무 것도 못 하는 이런 어린 것들을 두고 떠나…… 어이구 몹쓸 것들…….』
순간적으로 굳어서 멈춰있었다. 멍하니 있으려니 기범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 부모님 기일이란 걸- 세상에, 잊고 있었다. 지난 달에 분명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파출부 일이 그렇게 고됐나? 부모님 기일을 잊어버릴 만큼?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밥 먹을게. 맛있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늘 마음 한 구석에선 절대 잊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런 불효자가 돼버렸구나, 김려욱은. 어이가 없었는데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녀석이 잊게 해줬는지도 모른다는 기쁨이랄까. 아마 부모님께서도 황당해하실 것 같다.
- 그런 생각도 잠시, 기범이가 얼마나 찌개를 졸였는지 너무 짜서 다시 물을 붓고 끊이긴 했지만. 게다가 밥은… 햇반이구나. 그래, 난 이해할 수 있어…. 밖에 나가서 사온 게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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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2학년이 되었다. 제법 중학생 티도 벗고 교복도 이젠 어색하지 않다. 중학생 때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담배를 피러 가는 아이들이 줄었다. 그렇다고 끊은 것은 아니고, 중학생 때는 에쎄 같은 것들을 피우더니 요새는 심플이나 디스를 피운다. 에쎄를 피우니까 돈이 배로 든다면서 투덜거리는 남자애들의 수다는 여자애들 못지 않다. 더 수다스러우면 수다스럽지. 왠지 그런 모습을 보면 딱따구리 큰 것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 같다. 담배 한 갑씩 입에 물고.
기범이는 요즘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겨울 방학 때 많이 도와주었지만 아직은 벅찬 모양이다. 하지만 3월 모의고사를 치면 아마 선생님들 모두들 놀라겠지. 아마 앞으로 더 발전할 테니까,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면 괜히 뿌듯하고 설렌다. 아이들 대하는 것도 꽤나 부드러워져서 여전히 할 말만 하는 성격임에도 이젠 잘 어울린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규현이가 짜증낼 정도로 자주 찾아가서 요즘 규현이는 날 ‘기범이 보모’라고 부른다.
한참 다른 생각을 하면서 교과서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 앞 문이 열렸다. 어랏, 교감 선생님. 무슨 일일까 싶어서 모두들 교감 선생님을 향해 쳐다보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의 교감 선생님이 말을 꺼냈다.
“김려욱 학생. 어딨는가? 친형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네. 어서 가보게.”
- 친형…? 종운이 형?? 그대로 일어서서 선생님께 고개를 꾸벅한 후 나왔다. 일층까지 같이 내려온 교감 선생님은 가보란 말을 하고는 후닥닥 들어가 버리셨다. 종운이 형이 사업에 성공했단 말은 못 들었는데 무슨 일일까? 교문 쪽으로 뛰어가니 폐인이 된 얼굴이 있다. 거의 몇 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반가움 보단 또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우리 형제도 그닥 좋은 인연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학교는 안 찾아 오던 사람이?”
“려욱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절하는 자세의 종운이 형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주변에 경비 아저씨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쪼그리고 앉아 형의 머리를 건드렸다. 운동장이 근처에 있는 학교였다면 또 무슨 소문이 날 좇아 다녔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갑자기 왜 이래!! 그보다 형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드러운 거야! 또 안 씻고 다녔구나!! 내가 도망 다녀도 목욕탕은 꼭꼭 다니라구 했잖아!! 잘 생긴 형 얼굴 다 도망갔네. 까마귀가 친구하자구 하겠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응?”
“려, 려욱아…… 흐어엉…… 형 장기 뜯기게 생겨써어…….”
흙먼지와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하는 말 꼬라지에 눈을 꿈틀했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장기? 몸에 있는 장기?? 그렇다는 말은 또 돈 문제?!
“설마… 돈 문제……?”
“제, 제발……. 흑…… 너 요새 돈 많이 번다매…….”
“또 내 뒷조사 한 거야? – 얼만데 그래. 장기 팔 정도면…?”
“오, 오 천만원…….”
헉. 얘가 뭐라는 거야. 액수를 들으니 정이 뚝 떨어진다. 이건 보통 돈 쓴 정도가 아니잖아?! 경찰들 올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어!!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형이 싹싹 빌면서 쳐다보는데 벌떡 일어나서 교실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지금까지 기범이 돌보면서 모은 돈을 합쳐도 모자라는 액수를 어떻게 나보고 요구해!!
“나, 나 진짜로 죽어…….”
겁에 질린 목소리가 옛날의 장난스런 목소리와 같은 사람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여전히 무릎을 꿇었는데 고개를 들고 바라본 안색이 정말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래도 지독한 사람에게 돈을 뗀 모양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먹을 쥐고서 걸음을 멈췄다.
“-… 대신, 앞으로 명절 때마다 우리 꼭꼭 찾아와. 아무리 그래도 우리 형제잖아. 나야 앞으로도 형 볼 수 있겠지만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형은 혼자서 명절 보내면 쓸쓸하지도 않아? …아무튼 앞으로 한 번만 더 돈 문제 일으키면 진짜 의절이야. 할머니한테 내가 허락했다 말하고 내 통장 가져가.”
“고, 고마워…!!! 내가 꼭 한탕 크게 해서 갚을게!!”
“도박해서 잃은 돈 도박으로 메꿀 생각 말구 직장 가질 궁리나 해! 형은 분명 내 결혼자금도 떼먹을 거야. 참, 이거…. 목욕탕이라도 가는 길에 들렀다 가. 할머니가 얼마나 걱정하겠어. 남은 돈으로 바나나 우유라도 사 먹구.”
오천원을 쥐어주니 꼬질한 옷차림을 하고서도 벌떡 일어나서 해맑게 웃은 형이 가버렸다. 아직 이사는 안 했으니까 집 찾아가는 길쯤은 알겠지. 다시 한 번 형이 간 쪽으로 걸어가 형의 뒷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서는데 길가에 검은색 차가 있다. 햇빛에 반짝이며 빛을 내던 차가 도로를 타고 빠져나갔다. 어디서 많이 본 차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작년 기범이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올 때 탔던 차랑 비슷하다. 밤이었기 때문에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워낙 비싸 보여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기범이를 감시하는 걸까? 곧 떨어진 흥미를 접고 교실로 돌아왔다.
**
규현이는 나온 떡볶이를 포크로 푹, 찍어서 삼키듯 입에 넣고서 우물거렸다. 기범이를 보고 물 마시라며 말해주니 또 자기는 안 챙겨준다고 생각하는 건지 심통 난 표정이다.
“그 표정 좀 그만 지어. 진짜 징그럽다.”
“젠장…. 너네 둘 진짜 무슨 사이야??? 불어!!! 언제는 영영 갈라설 것처럼 굴더니, 이젠 바퀴벌레도 너네 앞에선 뒤 짚어 지겠다!”
눈 앞에 쑥- 들이민 포크에 뒤로 고개를 뺐다. 기범이가 규현이의 손을 잡고 밀어낸 후에야 물을 마시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이쯤 되면 말해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기범이에게 한 번 말했지만
부쩍 말이 는 기범이는 표현이 너무나 솔직해서(표정도 그렇고)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하지만 기범이가 말하게 된 이유의 팔할은 김려욱 아니었어? 난 그런 줄 알고 소문 냈는데.”
“…뭐…?”
“그럼 그 소문의 근거지가 너였어?! 그럼 그렇지!! 정보통
“아아, 다들 진정하시라구영. 솔직히 작년 이맘 때 생각해봐. 그때는 진짜 꼼~짝없이 개기범이 김려욱 조만간 매장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요즘은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하잖아. 이건 대단한 발전이라구? 너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람의 인연이란 게 엄청 대단한 거거든? 봐, 만약에 작년에 내가 김려욱을 만났는데 ‘그냥 반 친구’쯤으로 넘길 수도 있었단 거야. 중학교 때 같은 학교였는데도 한~번도 못 만났잖아. 고등학교 때 어쩌다 친해지긴 했다 쳐도, 이건 굉장한 일인 거야. 김려욱이란 사람한테,
“뭔 얘길 하고 싶은 거냐구우…. 이 말 많은 뇨석아…….”
“그러니까 내 말은
규현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쨌든 기범이랑 나랑 자기랑 친해진 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 같은데 그게 지금 규현이가 낸 소문이랑 무슨 관계인지 심히 궁금하다. 게다가 떠든다고 떡볶이는 안 먹는 줄 알았더니 지 혼자 반을 다 먹고 있다. 요즘 별명이 식신인
“아무튼, 떡볶이 그만 먹어!! 아주 지 혼자만 입이지?!”
“더 시키면 되지.”
“기범아!! 규현이 버릇 다 받아주면 안 돼!! 이러다 애 버릇 나빠진다구!”
“악!!!! 김력!! 감히 네가 날 동생 취급해?! 오늘이야 말로 승부다!! 포크 대결!!!”
“바라던 바야!!!”
“…… 이봐…….”
포크로 챙챙 거리며 투닥 거리고 있는데 기범이가 가운데에 포크를 끼웠다. 갑자기 중단된 포크싸움에 흥이 빠져서 기범이를 보니 한심하단 표정 그 자체다.
“그냥 더 시키자.”
“쪼아~!! 역시 기범이 횽아다!! 횽아 쫭이예영!!”
“…규현이 너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투 배웠어…?”
“어어~ 영어가. 그치? 영어 요새 일부러 말 귀엽게 하는 거 졸라 역겹지 않냐? 그 나이 먹어서 결혼도 안 하고. 이런 말투는 솔직히 내 미모쯤 되어야 받쳐주지 않겠어영? 후후후.”
“…
“결혼? 지금쯤 애가 둘은 있어야 정상인 나이쥐. 음악 봐. 서른 둘인데 애가 둘이잖아. 분명 영어가 연애를 못 하는 거겠지. 혹시 아냐? 달콤, 살벌한 연인처럼 여자가 좋아 죽!겠는데 여자하고 3분 이상 얘기를 못 하는 인간일지. 그러다 진짜 좋아하게 된 여자가 살인자인 거 아닌지 몰라!! 끄하하하하하!!!”
너한테 뭘 기대하겠어…. 고개를 저으니 장난기 가득 묻어나는 웃음을 터뜨리고서 활짝 미소짓는다.
“어쨌든 기범이가 이젠 정상이나 다름없게 된 건 대단한 일이야. 선생님들 책 읽는 거 시킬 때 더 이상 긴장도 안 하고. 칠판 문제 푸는 거 시킬 때도 이젠 괜찮잖아? 아~ 이래서 역시 사랑의 힘을 위대하다구 하나보다.”
“아부 그만 떨어. 떡볶이 추가했잖아.”
기범이의 딱 끊는 말에 갑자기 또 심통 상한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무뚝뚝하고 감정이 서툰 형이랑 어리광 피우기 좋아하는 동생 같은 느낌에 또 한 번 웃었다. 물론 기범이가 이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규현이가 광년이처럼 웃지 말라는 말에 또 주먹을 휘두르긴 했지만.
나란히 셋이서 걷는 길이 이젠 너무 익숙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 마냥. 여기가 당연히 김려욱이 있었던 곳이고 있어야 할 곳마냥. 슬금슬금 봉우리가 맺히는 벚나무를 바라보며 기범이의 손을 꼬옥 잡고 걸었다. 규현이가 보면 또 시끄러울 것 같아서 규현이가 학원에 간다고 중간에 빠진 순간부터 쭉.
이대로 계속 기범이와 걸었으면, 하고 바랬다.
『 려욱이한테 벌써 맘을 열었으니 조만간에 정상으로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겠네.』
지금 이 순간을 내 마음에 꾹꾹 누르듯 새겨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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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사과와 참외를 담아서 거실로 나가니 또 둘이서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 옆에 누가 와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작년에도 이랬지…. 일인용 소파에 앉아서 깍고 있는데 채널을 띡띡 돌리는 시큰둥한 기범이가 보였다.
“야야,
“그래, 기범이도 이제 같이 생각해 보자. 솔직히 난 이제 일본은 지겹거든.”
“……어디 봐….”
무시할 줄 알았는데 TV를 끄고 둘이 어지른 책자들 위로 손을 뻗는다. 영운이 형과 선생님에게도 요즘은 살갑다는 느낌마저 든다. 선생님이 작년 기범이한테 맞고, 기범이는 자살하려고 했던 일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이런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과일을 깍아 놓으니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는데 금새 하나씩 입에 문다.
1학기 기말고사에서 기범이는 전교 100등 안에 들었다. 규현이는 뒤에서 100등 아니냐며 확인하라고 했지만 기범이는 확실히 전교 98등이었다. 교내에서 기범이 성적은 왠만한 아이들이 아는 일이 됐다. 지금 1학년들도 기범이 이름은 몰라도 소문은 이미 다 아는 형편이니까.
“너도 먹어.”
“그래. 에, 먹여주는 거야?”
“-.“
“어, 어…….”
기범이가 포크로 사과를 하나 찍어 입에 물렸다. 참외를 깍다 말고 물려진 사과를 먹는데 선생님과 영운이 형의 표정이 뭔가 골이 난 느낌이다.
“이거… 지금 우리 빨리 가 버리라고 시위하는 거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쏠로들 앞에서 염장질을 하다뉘…. 이래서 자식 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단 거군…. 어떻게 기범이 네가……. 흑, 흑, 흑, 흑.”
“됐거든~? 떨어져!”
자신에게 기대오며 우는 체 하는 영운이 형을 밀어낸 기범이가 툴툴거리고는 밉지 않게 또 웃었다. 소파에 기대 책자를 지루한 듯 넘기는 선생님은 별 말씀이 없다. 요즘 들어 뭔가 생각하는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겁이 난다. 왜…?
“려욱아, 기범이가 조만간에 나 죽이겠다. 그만 쳐다봐.”
“예? 헉……. 기범아! 나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뭔데? 너 요즘 여유 많이 생겼지?”
“아오옥!!! 제발 부부 싸움 따위를 내 앞에서 하지 마!!!”
**
또 이 자동차다. 보는 것은 세 번째고 타는 것은 두 번째다. 평생 TV에서나 보던 차를 타는 일이 두 번이나 된다는 건 기쁘긴 하지만, 회장님이 또 무슨 일로 날 부르는 건지. 오늘도 떡대 아저씨들한테 팔이 붙잡혀서 타고 가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기범이가 또 기다릴 텐데.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번에 봤던 그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여유도 생겨서 창가에 기웃거리기도 하고 의자나 패찰들을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유리 같은 재질의 패찰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엄청 깔끔한 성격이시구나. –드라마에서 봤던 가족 사진 따위가 올려져 있으려나 싶었지만 서랍도 없는 책상은 휑하기만 했다.
“많이 기다렸나? 앉게나.”
“아, 네….”
위압감에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동안 말이 없던 회장님이 비서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놓은 커피를 마셨다. 근데 왜 난 초코 우유야…. 내가 기범이도 아니고…….
“기범이가 좋아하지? 초코 우유.”
“예?! 네, 네….”
이 썩는다고 다시 먹으면 키스 안 한다고 협박 했더니 요새는 안 마시는데….
“못 먹고 있겠지만.”
“?!”
“원래 눈이란 항상 어디든 존재하는 거네. 언제나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지.”
“아, 예….”
위압감에 마주쳤던 눈을 어쩌지 못 하고 있는데 꼭 쥔 주먹으로 땀이 느껴졌다. 긴장하고 있는 거야, 나…?
“아마 왜 불렀는지 짐작은 하고 있겠지. 기범이 성적을 봤네.”
“…….”
“의사들도 포기했던 아이를 자네가 정상으로 만들었어.”
“아, 아닙니다…….”
“아마 자네도 짐작은 했겠지. 자네가 어떤 목적으로 고용이 됐는지. 그리고 지금 그 목적은 달성 됐다는 것도. 그래서 이젠 자네가 할 일이 다 끝났다는 것도 말야.”
나는 입을 떼지 못 하고 초코 우유가 놓여진 테이블 위로 시선을 깔았다. 어두워진 표정이 확연히 비쳤다.
“이대로 기범이 앞에서 사라져 주게.”
“예?! -그냥 일을 그만 두는 것만…이 아닌 가요?”
“-
“?!”
“그 자가 지금 우리에게 빚진 돈이 2억쯤 되지.”
“설마…….”
소파에 몸을 묻고 편안하게 나를 바라보던 회장님이 입가에 인자한 웃음을 띠었다.
“우리 기업이 부가적으로 하는 사업쯤 돼. 다른 곳보다 큰 액수를 쉽게 빌리거든. 대신 이자와 독촉이 좀 쎈 편이긴 하지만 말야. 보아하니 각막이랑 심장, 간, 신장, 골수 합쳐도 2억은 안 되더군. – 자네가 내 말을 듣는다면 그 자를 살려줄 순 있지.”
“그런…….”
“하지만 듣지 않는다면 자네 할머니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어떻게…….”
혼란스럽다. 어질거리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지만 힘겨웠다.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할머니까지 협박을 하다니…. 형의 겁의 질린 얼굴을 봤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던 걸까. 그 때 그 자동차를 보고 난…….
“난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알고 있어. 굳이 자네를 협박하지 않더라도, 자네가 할 일이 이제 없지 않은가? 기범이가 온전히 독립하기 위해선 자네가 사라지는 건 꼭 필요한 과정이야.”
“-… 형이랑, 할머니는…… 손대지 말아주세요…….”
“잘 선택했네. 이대로 차를 타고 가면 새 집으로 갈 걸세. 서류상의 일은 다 처리해주겠네. 학비, 집, 세금…. 당분간은 퇴직금 치고 우리가 대주지.”
기다렸다는 듯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나를 일으켰고, 순순히 따라갔다. 순간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벨 소리가 회장실에서 홀로 크게 울렸다. 잡혀진 채 전화를 받지 못 하는데 회장님이 다가 오더니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생각보다도 깊이 의지하게 된 모양이군. 가 봐.”
차에 올라타고도 멍했다. 오늘 학교에서 있던 일들이 모두 멀게만 느껴진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집에서 영운이 형과 선생님과 웃었는데, 신기루마냥 모든 마법이 풀린 것 같다. 차에 태워졌을 때 경호원 두 명과 달리 염색한 보랏빛 머리 색이 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보조석에 앉아 있던 선생님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지나치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상처… 많이, 받았니…?”
“…….”
“필요했어…. 기범이를 잘 돌봐줄 수 있는, 기범이와 비슷한 상처가 있는, 그런 아이가…. 단순한 결벽증, 그 이상의 상처가 있는-. 보통 사람은 이해 못 할 그 세계에, 넌 너무나 쉽게 들어갔지…. 기범이는 아마 처음부터 알았을 거다…. 기범이 어머니가 나한테 그랬거든.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또 다른 사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
“어쨌든, 미안하다….”
“-…아뇨….”
밖을 보는 내 눈에서 뭔가가 흐르는 듯 보였지만, 눈에 자꾸 물이 차는지 흐릿해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선생님이 나에게 던지듯이 했던 말들은, 이런 상황이 됐을 때 상처를 덜 받길 바라는 마음이었나 보다.
**
회장은 차를 타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또 다시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 액정을 보던 회장이 피식 웃었다. 기사는 그런 회장의 반응에도 가만히 운전만 했다. 어느새 차는 한강 쪽으로 진입했다. 창문을 내리자 바람이 강하게 밀려 들어왔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선명하게 빛나는 네온사인들을 보던 회장이 휴대폰을 창문 밖으로 내 던졌다. 다시 올린 창문에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기사는 멀리 사라지는 휴대폰의 벨소리를 상상했다. 누구였을까. 그토록 애타게 울리는 휴대폰의 주인은.
다시 차 시트에 편안하게 앉은 회장은 킥킥 웃다가 그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는 근 몇 년 간 보지 못했던 모습에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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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광주에 기범이네 아버지가 주신 집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계속 미안하다고 하다가 가라고 신경질까지 내자 쭈볏쭈볏 차에 타서 떠났다. 할머니께선 모든 설명을 들으셨는지 특별히 내게 말씀이 없으셨다. 아마 종운이 형으로 협박한 걸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란 얘기였다고 생각하니 새삼 기범이네 아버지가 무서워졌다.
2학기부터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기로 수속을 밟고 이사온 다음날부터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저번에 종운이 형이 가져간 돈 때문에 파출부로 있으면서 모아둔 돈이 모두 바닥나버렸다. 벼룩에서 전화를 하면서 좀처럼 취직이 되지 않아 머리를 벅벅 긁다가 답답해져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기범이, 예전엔 항상 입대고 마셨는데, 지금 나 없다고 신나서 집안 다 어지르고 있는 거 아닐까.
한숨이 났다. 물을 마시고 거실에 앉아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가 요리 프로그램이 나왔다. 뭘 하든 관심도 없는 기범이는 요리를 하는 프로그램을 무척 열심히 봤다. 그렇다고 요리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밥 차려주는 건 이제 할 수 있을 테니까 굶고 다니진 않겠지. 여름이라 입맛 없을 텐데….
짜증이 난다.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어야겠다. 집에만 있으니 자꾸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난다. 마트에 들어가서 습관적으로 코너를 돌고 있는데 우유를 반값 세일 하고 있다. 못 먹게 했던 초코 우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먹게 할 걸 그랬다. 이를 안 닦는 녀석도 아닌데- 무슨 충치 걱정이라고. 떡볶이 재료를 옆 코너에서 팔고 있다.
규현이가 말했던 인연이란 건, 이런 의미였을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각자의 삶을 바꿔 나간다. 이전에 얼굴도, 목소리도 몰랐을 상대를 알아간다. 그 감정이 미움이든 사랑이든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고 인연을 쌓아간다. 떨어져도 기억이 남아버려서 쉽게 지워지지 않아….
억울해. 난 이렇게 조그만 것 하나까지도 널 생각하는데, 넌 일주일이 지났는데 날 찾지도 않냐? 나쁜 놈. 괜히 울 것 같아서 곧바로 계산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무심코 벨을 눌렀다가 기가 막혔다. 할머니가 노인정에 가셨는 걸 분명 아침에 확인하고 배웅까지 해드렸는데, 손이 미쳤던지 머리가 미친 모양이다.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세수를 계속 했다. 눈이 빨간 건 갑자기 세수를 해대니까 물이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거고, 얼굴이 붉어진 건 차가운 물 때문이다. 먹으려고 했던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버려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다음날 숟가락으로 벅벅 봉지를 긁어 먹었다. 세상에 아이스크림 긁어 먹으면서 우는 사람은 아마 나 밖에 없을 거다.
**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름인데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낮에는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할 일도 없어서 또 바닥을 닦고 있으니 기범이에게 음료수를 쏟아 부었던 때가 생각난다. 그땐 정말 영락없이 제사치를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 날 파출부로 처음 고용됐었지. 완전 쫄아서 옆에서 자지도 못 하고 온 집안을 청소하고 다녔는데….
그 후에 염산 떨어뜨릴 뻔한 일에다 같이 가자는데 짜게 식어졌던 일도 있었고. 나중에 먼저 말 걸어주고 같이 가자고 했을 땐 내가 마약을 한 적도 없는데 환각을 보나 보다, 생각했다. 영운이 형 때문에 억지로 놔두고 나온 날은 비가 내려서 영락없이 감기 걸리는 줄 알았었고…. 수학시간엔 문제 잘 풀길래 공부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성적 붙은 거 보고 어이없었지. 지금은 그때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이 많이 올랐지만. 지금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을까.
작년 방학 때는 얼마나 밖으로 같이 돌아다녔던지, 그런데 나는 새까맣게 타고 치사한
가출한 줄 알았더니 남산타워 가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웃겨. 처음엔 무시하는 줄 알고 엄청 기분 나빴는데. 모의고사 시험지 가지러 우연히 기범이네 가정사를 알게 됐을 때 충격은 지금도 아찔하다. 기범이가 자살 하려는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었고…. – 설마, 자살하려고 하진 않겠지?! 하긴… 고작 나 없어진 걸로 자살한다니 그것도 좀 웃긴 얘기네…. 멍하니 서 있다가 괜히 바닥을 물 걸레로 퍽퍽 치댔다. 빨아와야겠다 생각하는데 손님이다.
“어? 현우야. –오늘도 우유 사게?”
“형아…. 나 고민 있어.”
“왜애? 우리 잘 생긴 현우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형한테 왔어?”
“휴….”
초코 우유를 집어와서 계산해주니 스낵바 쪽 의자에 앉아서 빨대를 꽂아 먹기 시작한다. 현우는 일주일 전에 처음 일하게 됐을 때부터 매일 우유를 사 먹으러 와서 알고 지내는 아인데, 초등학교 4학년이다. 물론… 겉보기엔 2학년처럼 보이긴 하지만…. 자기도 그걸 아는지 항상 컴플렉스 삼는 것 같다.
“왜 지선이는 날 못 믿는 걸까?”
“어-…? 여자…친구야?”
“응. 방학하기 전에 사귀자고 해서 사귀는데, 지선이가 날 너무 못 믿어. 게다가 잔소리도 엄청 심하고. 전화도 매일 하는데 귀찮아. 의처증이 아닐까?”
…의부증이겠지…. 그보다 한번에 사귀자고 하다니, 얘 보기보다 박력 있네. 나랑 기범이는 엄청~ 흐지부지 하다가 겨우 됐는데. 싸우고 쌩난리를 피웠지….(일방적으로 화낸 거긴 하지만….) 역시 요새 애들은 다르구나, 달라. 초코우유를 그새 다 먹고 바닥 빠는 소리가 나자 현우는 더 빨다가 우유곽 윗 부분만 꾹 눌러서 쓰레기 통에 넣었다. 기범이도 저런 식으로 먹은 후에 우유곽 윗부분만 눌러 버려서 나한테 혼났는데. 뭔가 분리수거 대충 하는 것 같잖아….
생각해보니까 맨날 내 방식만 강조했구나. 그런데도 별 불평 없이 다 들어줬어. 깜빡 잊어 버리고 원래 습관대로 하면 꼭 미안하다고 말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내가
“형! 지선이 의처증이냐고!!”
“헉. 깜짝이야. 어?! 아, 그러니까…. 형 생각엔 현우 네가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사실 사귀는 초기엔, 좋아하는 마음이 큰 만큼 서로 못 믿는 거야. 하나하나, 너랑 지선이가 함께 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그만큼 믿음을 하나씩 쌓아가야 하는 거지. 형 보기엔 지선이가 그러는 게 오히려 귀여운데? 그만큼 현우를 좋아한다는 거잖아.”
“휴…. 형은 항상 너무 속 편하게 생각해. 암튼 고마워! 내일도 마상 올려줄게. 안녕!”
“그래- 내일 봐아….”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청소나 해야겠다.
**
휴대폰을 새로 장만했다. 사실 살 필요는 없었는데 주인 아주머니 친척이 휴대폰을 파는데 기계를 가지고 있어봐야 도움이 안 된다며 나에게 싼 가격에 팔았다. 솔직히 약~간 구형이지만 할머니가 나한테 전화하기 편해지겠지. 이리 저리 버튼을 누르다가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아- 젠장. 또 우냐. 지겹다, 지겨워. 이런 일쯤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왜 그래. 벌써 한참 전에 집 전화까지 다 걸어봤었으면서 왜 또 울어. 병신, 머저리, 팔푼이. 폴더를 덥고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한 후 나왔다. 할머니께선 거실에서 졸린지 누우셨는데 TV만 켜놓고 눈은 감고 계신다. 기범이는 TV 본다고 억지로 떼쓴 적이 없었는데 할머니는 TV만 끄면 자기는 안 잤다고 하시니, 참…. 억지로 할머니를 깨워 방에 들어가시는 것을 확인하고 TV를 끄자 거실이 순식간에 초침소리를 빼고 조용해진다.
순간 들리는 벨소리에 방 안에 들어가니 이상한 번호…. 아직 번호를 아는 사람은 할머니뿐인데-, 그냥 받고 끊으려는 셈으로 통화버튼을 누르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려욱이 너, 핸펀 샀음 말을 해야징!!”]
“선생님? 어떻게 알았어요?”
[“…어?! 어…, 그, 네가 핸펀 산 사람이 규현이 친척 형의 친구래. 하, 하, 하…. 광주는 어때? 지낼만 하니?”]
“흥…. 선생님한테서 그런 질문 받고 싶지 않아요. 옆에 누구 있어요?”
[“어- 영운이. 아, 잠깐만!!
“여전히 시끄럽네요.”
[“김려욱!! 너 그렇게 암말도 없이 그만두면 어떻게 하냐?! 진짜 너무한다- 난 그래도 전화 한 번은 해줄 줄 알았더니. 넌 내 생각은 한 번도 안 났냐?! 너 맨날 기범이만 챙기드니!! …악, 왜 꼬집어! 암튼 기범이도 얼마나 너 기다리는지 알아? 요즘 밥도 잘 안 먹고 말은 아예 안 하고 공부만 한다고 집에 쳐 박혀서 애가 피골이 상접해서 허옇게 질렸-악악악!! 아프다고!!”]
“…형, 나….”
울음에 목이 걸려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처음으로 듣는 기범이의 소식이 밝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만 있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픈 건 더 싫은데. 내가 너무 기범이의 생활을 바꿔버린 걸까. 그래서 너와 나, 둘 다 이렇게 힘들어져 버린 걸까. 내가 널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너에게도 차라리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널 그냥 단순히 특이한 아이쯤으로 생각하고, 파출부가 됐어도 네 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면 나도 너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나 기범이 목소리 듣고 싶어…. 얼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어떻게 해…….”
[“……려욱아…….”]
“나 이전에 내가 어땠는지 잘 생각이 안 나. 파출부로 기범이하고 있기 이전의 내가 어땠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잔소리가 심했는지. 간섭이 심했는지. 맨날 한 사람 생각하고 지내는 게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진짜 모르겠어. 어떻게 해? …난 진짜 내가 이렇게 바뀔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왜 내가 이렇게 돼 버렸을까? 아파…. 마음이 너무 아파서 진짜 죽을 것 같아…. 기범이 얼굴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 목소리가 어땠는지 모르겠어. 습관이나 어떤 일이 있었는진 기억이 나는데 그때 기범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을 했었지? 나 머리가 텅 비어서, 그래서 다 까먹은 것 같아. 내가 병신이 된 것 같아. 형, 형 나 어떡해….”
한 달 내내 참았던 울음을 한번에 보내려는 듯 눈물이 내내 마르지 않았다. 억지로 통화를 끝내고서도 울면서 겨우 잠이 들었다.
**
평일에 일을 하고 주말은 집에서 느긋하게 노는데 할머니께서 노인정에 가겠다고 나가신다. 아무래도 맘에 드는 할아버지를 만나신 모양이다. 잘 되면 좋겠다. 배웅해 드리고 문을 잠그고 거실에 누워서 TV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8월의 중순에 접어든 광주는 남쪽 지방답게 굉장히- 덥다. 그래도 집에 있으니까 살 만은 하지만. 어제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었다. 절대 안 나가. 완전 꼴 사나워.
벨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베란다에 빨래 널면 안 되나? 땅값 떨어진다고? 기범이랑 살 땐 그 항의 덕에 거실에서 옷 말린다고 고생 좀 했지. …아주 본능이네, 이건. 무심코 문을 열었는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래서 굳어 있었다.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후다닥 문을 닫으려는데 기범이 발이 문에 끼였다.
“아야…….”
“-많이 아파?! 그러길래 왜 발을 넣구 그래!! 빨리 들어와!!”
얼굴을 찌푸리며 등을 숙이는 모양새가 처량해서 얼떨결에 집안으로 들였다. 아, 오늘 청소 안 했는데, 하필…. 거실에 앉혀놓고 구급상자를 찾으려는데 안 아프다고 하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가 목이 또 꺽여서 울 뻔했다. 초코 우유를 내 주고 목에 물파스를 바르며 앉아 있었다.
“한 달 동안, 나 없이도 잘 지냈어?”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왔니?”
기범이의 물음에 의도한 것도 아닌데 차가운 말이 불쑥 나왔다. 수척해진 뺨에 햇빛을 다 받으며 왔는지 드러난 몸이 빨갛다. 괜히 속이 상했다. 왜, 왜 네가 나 때문에 이래야 돼. 시선을 피했다. 햇빛이 집안의 커튼에 가려 비췄다. 선풍기 하나만이 거실에서 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덥다.
“…너무 힘들었어. 난 아직도 네가 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해.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공간에 있다는 게 미칠 것 같아.
“-……김려욱은,
선풍기의 탈탈 거리는 소리가 또 침묵을 대신했다. 기범이는 유리잔에 입 한 번 대지 않는다. 갑자기 내 티셔츠 앞목을 잡길래 뿌리치려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는다. 순순히 기범이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바닥에 쓰러트리고 위에 올라타는 기범이를 일부러 차갑게 노려보았다.
– 어차피 희망이 없다면 여기서 더 잇지마. 날 기대하게 하지마.
“변한 거야…? 그래? ……너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니…?”
“-그래.”
“김려욱의 사랑이라는 건, 참 쉽게 변하는 건가 보네…?”
“-……사랑이 변해? 사람이 변하는 거야. 너 지금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예전엔 네가 내 고용인이었다지만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난 이제 네 도련님 놀이에 장단 맞춰줄 이유가 없어. 알겠어?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냉정한 말에 기범이가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물기가 차오르는 눈에 무심코 손을 뻗을까 봐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다. 기범이가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잠그기 위해 일어나자 현관문에 서 있던 기범이가 고개를 돌렸다. –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나는 아무 힘도 없어서 보내줄 수 밖에 없다. 날 찾으러 일부러 와준 기범이를 잡을 수가 없다. 그대로 현관문을 나서는 기범이의 등을 보며 문이 닫히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를 받으니 영운이 형이다.
[“둘이 잘 만났냐? 기범이가 요즘 너 때문에 목숨 걸고 공부하다가 갑자기 보러 간대서 걱정했는데.”]
“예?”
[“아버지한테 걸릴까 봐 혼자서 갔는데 너도 느꼈겠지만 기범이 요즘 많이 약해졌어. 전국 1등 하면 너 다시 붙여 준다고 요새 밤낮으로 공부하는데 영 쉽지 않은가 봐. 내치지 말고 좀 따뜻하게 대해줘라. 오죽 보고 싶었으면 그 사람 싫어하는 녀석이 참고 가겠어? 말은 안 하지만 많이 기대하는 눈치던데. ……야, 듣고 있어?”]
“형, 형, 나….”
전화기를 팽개치고 빨리 신발을 구겨 신고 나섰다. 이번만은 제발, 놓치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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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나를 외면했을 때, 나는 착한 아이인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서든 내 자리를 만들어 두는 걸 좋아했다. 내가 없어졌을 때, 날 필요로 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제자리에 있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세상에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필요로 맺어진 관계에서 필요성이 없어지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고, 미련 따윈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까지 필요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은 안 했지만 기범이와 있으면서 늘 했던 한 구석의 건방진 생각. ‘기범이는 내가 없으면 안 돼.’ – 그래, 기범이는 나여야만 해. 그 건방진 생각을 부정하지 않을 거다. 내 욕심일 뿐이라도, 기범이는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아도, 내가 용납 못 하니까.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기범이는 상상도 하기 싫어.
- 그런데, 이제 깨달았다. 나만이 기범이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김려욱이란 나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가는 숫자를 보고 비상구로 뛰어가 계단을 뛰었다. 순간 발이 삐끗하는가 싶더니,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해 버렸다.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집 천장이었다. 이마에 놓여진 물수건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기범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굴러서 계단 내려올 생각을 해? 하여간 몸으로 꼭 보여줘야 하지?”
“…흥. 그러는 누구씨는 한번만 돌아보고 매정하게 잘 가더라.”
옆에 앉아서 이마를 대어오는 손이 차갑다. 물을 갈아온다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말하는 기범이는 나를 보고 샐쭉하니 웃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라 쑥스러움에 고개를 돌리고 다시 눕는데 어깨를 잡아 똑바로 눕힌다. 수건을 빨아 이마에 얹어준다. …이제 보니 이마에 땀이 많이 난 게 아니라 대충 짠 거구나. 하긴,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뭐하냐고 물으니 또 씨익 웃고. 나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한달 만에 만났는데 좀 솔직해 질 걸. 하지만 종운이 형이나 할머니를 생각하면 무작정 반길 수는 없었다.
“근데 가버린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안 거야?”
“아, 나 담배 피려고 밖에 나간 거였어. 여차하면 너 기절시켜서 서울 데려갈 생각도 했었거든. 말했잖아. 나 싫어하든 좋아하든 너 아무데도 안 보낼 거라고. 려욱이 너, 날 영~ 못 믿는구나?”
……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스토커 기질이 보인다, 보여…. 게다가 속마음까지 읽어.
“…하지만 너한테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고 싶지 않았어.
“어….”
“집으로 전화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도청기가 붙어있을 게 뻔해서 안 한 거야. 또, 네 목소리 들으면… 내 결심이 흔들릴 것 같기도 했고…. 너 하나 못 지키는 약해빠진 녀석이 되긴 싫거든. 처음엔 네가 날 못 믿고 협박에 바로 넘어간 게 열 받았는데, 네가 날 믿을 수 있는 이유가 하나도 없더라구. 그래서, 반성 좀 했지.”
누워서 그런가. 괜히 뒤에 빛이 들어와서 후광이 나는 것 같다. 이때까지 이렇게 기범이가 믿음직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어린 줄로만 알았더니. …아, 나 얘랑 동갑이지. 나를 보며 미소 짓는 모습부터 예전하고 많이 바뀐 느낌이다. 색다르네…. 꼭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한테 남주인공이 대성해서 데려가겠다고 고백하는 장면 같다.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입술에 가볍게 부딪힌 기범이가 또 웃었다.
“너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장학금 받아서 오라구. 아니면 그냥 나한테 시집오던지.”
“하…. 너 많이 컸다~? ……풋. 너나 열심히 해. 그리고 시집은 무슨. 너, 가사노동도 노동의 일환이야. 그러니까 돈 받을 꺼야. 시간 별로 계산해서. 나 좀 비싸거든?”
“흠…. 그럼 반반으로 하지 뭐. 네가 견딜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한 달이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길 시간 동안, 생각보다 기범이와 나는 많이 자란 것 같다. 작년 일본에서 기범이와 잠깐 손 잡고 간 것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서로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까 어긋나는 부분은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조금만 서로의 입장에 다가서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기타의 줄이 떨어져 있음으로 각자의 소리가 나는 것처럼, 우린 각자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단점조차 서로의 장점과 어울리면-, 어쩌면 아름다운 화음이 날 거라고 생각해.
“넌, 평생 무료야.”
- 그래, 평생.
**
고기 잘라주랴, 불 날라주랴, 술 날라주랴…. 뛰어다니는 나를 바라보던 규현이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와주었다. 아줌마는 착한 친구를 뒀다며 기뻐했지만, 이 녀석이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았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아서 만났을 때도 떨떠름하게 가만히 있기만 했다. 일을 마칠 때쯤 아줌마는 도와줘서 고맙다며 규현이에게 밥과 반찬 따위를 내 주었고, 나도 그 앞에서 밥을 먹었다.
“그나저나 너 대학은?”
“K대 장학금 받아서 붙었어.”
“그… 친형은 이제 도박 그만 뒀냐?”
“뭐, 지금은…. 또 사업한다고 나갔는데 그냥 몸만 멀쩡히 돌아왔음 좋겠어. ……너 근데 어떻게 종운이 형 일까지 아는 거야?”
“어~ 선생님한테 들었지…. 야, 이래봬도 내가 나중에 흥신소 차릴 사람이야. 심부름 업체 말이다. 돈만 제대로 주면, 내가 못 캐는 정보는 없다. 이거야~.”
“국가 기밀도 팔아 치울 거 같아, 너는.”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뵈냐?! 이 나의 훈훈한 얼굴과 기럭지를 봐!!!”
“그건 외모하고 상관없어.”
“-… 흥, 하여간 바퀴벌레들. 서울에 왔음 왔다고 말이나 한 번 해 주던지. 진짜 괴물 커플이야. 나한텐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어떻게 한 놈은 의대 수석에 한 놈은 K대 장학금이야. 미쳤다, 정말 미쳤어. 그것도 난 꿈도 못 꿀 대학으로 말야. 난 이번에 망쳐서 아예 연예계 쪽으로 파보려고. 그리고 연예인들이 원하는 정보를 캐주고 일을 해 주는 거지. 분명 쓰는 단위가 다를 거야. 거기서 인맥 쌓아서 대기업들 뒷동네에서 일하는 거야. 나중에 사채 사업까지 하면, 너네 둘이 성공한 것보다 훨 부자 될 거다. 후하하하하.”
그러니까 네가 국가 기밀도 팔아 치울 녀석이라는 거야. 혀를 차다가 잠시 멈추었던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반찬을 집어 먹는데 무심한 내 반응에도 한동안 조용하던 규현이가 다시 입을 뗐다.
“뭐, 어느 정도는 눈치 깠지? 왜, 너네 1학년 때 겨울초인가…. 대판 싸운 적 있잖아. 그때 방심하고 기범이네 아버지 이야기 꺼낸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었는데. 내가 그 나이에 장기 다 뜯겨서 죽을 순 없잖아. 돈은 제대로 챙기긴 했는데, 암튼 기범이네 아버진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아냐. 정말 상종하기 무서워. 그래도 병원에 있다니 밤길은 덜 무서워졌지만 말야.”
“밥 먹어. 그리고 남 아픈 거 함부로 말하는 거 아냐.”
그 이후 2년이 지났다. 할머니는 편안히 돌아가셨고 난 추천제로 K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친절히도 집안 환경까지 고려해줘서 장학금까지 받고. 고혈압 덕에 주의를 받던 기범이네 아버지-는 최근에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병원에 계신다. 요즘 몸에 마비 증세가 오는 것 같다고 해서 한번 병문안이라도 갈까 하다가 기범이가 화내는 바람에 또 싸울 뻔했다. 너무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속 편하게 생각한다며 화내길래 같이 소리 질러버렸다. 한참 기범이 생각하느라 얼이 빠져 있다가 규현이가 신경질을 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옷을 챙겨 입고 식당 문을 나서니 기범이가 매우 불쾌한 티를 내면서
영운이 형은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고, 선생님은 여전히 학교에서 아이들을 닦달하며 지낸다. 나와 기범이가 사는 곳에 자주 찾아오긴 하지만, 서울에서 지내게 도와준 것에 대해선 감사하고 있다.
“려욱아, 진짜야? 디오그라티스 백 번 쓰면 좋아하는 거 진짜 이뤄지는 거야?”
“예?”
“아니- 내가 지금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는데, 도통 아리송해서…. 그래서 기범이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니까 네가 가르쳐 줬다고 하던걸. 나도 내년엔 꼭 장가 가야지.”
“근데 그거 효과는 없었어. 김려욱 광주로 갔을 때 공부하다가 심심하면 백 번씩 썼었는데 서울에 절대로 안 오더라구. 그래서 내가 갔지. 김려욱 주특기인 둘러 대기였지 싶어.”
“뭐어?!?! 기범이 너 내 말 못 믿는 거야?!??”
“아주 커플이라고 이마에다 써놓고 가지 그러냐. 어유, 징그러 징그러~.”
“그러게 말이야. 저러다 나중에 아예 합체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시끄러. 아무튼 디오그라티슨지 뭔지 효과 없어. 믿지마. 그딴 거 다 미신이야. 왜냐하면 그 주문은 나하고 김려욱한테만 통하는 주문이니까. 성민이 형이 아무리 그래 봤자 안 된다구. 어차피 형 여자들한텐 인기 있는 편이니까 열심히 대시하면 넘어오겠지.”
“기범이 너 넘어가려고 하지마!! 너 지금 내 말 못 믿는 거야?! 어쩜 네가 그래?? 나 진짜 삐칠 거야!!”
“아아악!!!!! 또 부부싸움하냐?! 아씨, 괜히 왔잖아요!! 선생님!!”
“나도 기범이가 저렇게 변할 줄은 몰랐엉….”
“당연한 거 아냐? 원래 그 주문은 나하고 려욱이처럼 순수한 사람들한테만 통하는 거야. 형이나 규현이처럼 마음에 털 난 사람들이 쓴다고 먹힐 주문이 아니란 거야, 알겠어? 아니다, 형이랑 규현인 털 난 정도가 아니지. 이미 발효하고 있는 중이니까. 김치로 치면 뭐… 아주~ 신 김치 정도?”
“선생님, 저 기범이 쫌만 때려도 되요…?”
“응…. 못 이기면 선생님이 도와줄게…….”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달려드는 규현이를 피해 손을 잡고서 냅다 뛰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밤바람이 상쾌하다. 이대로 계속 웃으면서 기범이와 지낼 수 있기를 바랬다.
망연자실하며 따라오던 규현이와 선생님이 멈췄다. 달리기를 멈추고 기범이와 서서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소리를 꽥 지르는 규현이를 피해 집까지 뛰어오긴 했지만 기범이랑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 파출부는 오늘도 달린다 (完)
----------------------------------------------- 完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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