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분을 절대 배려하지 않는 포스팅을 잘 하는 시엔입니당당당.
메르헨의 원설정 버전의 소설, 엄청 길어유ㅋㅋㅋㅋㅋ 스크롤의 개압박이 멋진 녀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 말곤 장점이 없을지도...
암튼 전 또 나머지 구멍을 메꾸러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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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옛날에 한 왕자님이 살았습니다
5월로 접어든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 기념일들이 많아서 매상도 쭉쭉 늘어나 혁재는 뿌듯하게 장부를 계산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봄바람을 만끽하며 실실 쪼개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려욱에겐 반갑지 않겠지만, 혁재에게 이 같은 손님은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한다. 사랑에 미친, 그것도 제대한지 얼마 안 된 순진한 남학생이 쓰는 돈이란 얼마나 황홀한지. 혁재는 새삼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 둔 꽃다발을 내었다.
“오늘도 장미꽃 스물 네 송이지?”
“네. 오늘은 좀 기뻐하면 좋겠는데-…. 형!! 진짜 려욱이 형은 좋아하는 꽃이 없나요?!?”
“흠-. 없어 없어. 내가 왜 그 녀석을 모란에 비유하는데. 너도 어쩌다 그 얼음공주에게 꽂혔는지, 운도 없구나-.”
“예? …감정……. 아니에요. 제가 처음에 반한 게 려욱이 형의 미소였는걸요. 그때, 비 오는데, 우산을 쓰고선 전화를 받는데, 그 미소가-. 진짜, 잊을 수가 없어요. 얼마나 질투했었는데요. 그런 표정으로 전화를 받아주던 상대를.”
“성민이 형인가?”
“?”
혁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형제의 공방전을 지켜봐 온 장본인이면서 무슨 말을 한 거람. 려욱이 성민을 형제로서 특별히 아끼는 점은 있었지만 혁재가 보기에 그건 자연스러움이 아닌 ‘인공’적인 느낌이었다. ‘이 사람은 내 형이야.’라고 주문 거는 듯한. 스치는 말에 별 관심이 없던 규현은 몇 번 향기를 맡더니 씨익 웃고 가 버렸다. 혁재는 달력을 찬찬히 읽었다.
- 어라.
달력을 보던 혁재는 곧 심각한 표정이 돼선 반대편 볼을 긁적거렸다.
#1-2. 그리고 왕자님에겐 사랑하는 공주님이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카페로 뛰어들어온 규현은 앞서 아르바이트 하는 민주의 핀잔을 받았지만 아랑곳없이 씩 웃었다. 카운터 겸 주방 쪽에 재빨리 들어가 려욱의 몸을 돌려세운 규현이 짠! 하고 꽃다발을 내밀었다. 혀를 차는 민주를 무시하고 해맑게 바라보는데 려욱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십초쯤 지나자 규현이 울상으로 변했다.
“혀엉……. 안 궁금해요…?”
“그래. 스물 네 송이. 나는 스물 다섯인데 왜 네가 스물 네 송이를 사왔냐. ‘형이 나머지 한 송이예요’. 지금 너 이거, 일주일 째 하고 있는 거 알지? 근데 내가 놀라주리? 아니면 감격해주리? …빨리 옷 갈아입고 민주랑 교대해 줘.”
“네에…….”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쑥 내미는 민주에게 대꾸도 없이 풀 죽어서 들어가는 규현의 뒷모습을 보던 려욱이 픽 웃었다. 만들던 커피를 완성해 내주자 민주가 서빙 후 려욱에게 돌아왔다. 규현이 선물한 장미를 손질해 꽃병에 담는 모습을 보던 민주가 입을 열었다.
“저 꼬맹이가 그렇게 애걸복걸 원츄하는 그 미소를 왜 그리 아끼냐? 한 번 웃어주는 게 뭐 큰 일이라고.”
“…너 이번 주말까지 초벌 번역 해야 한다며. 하여간 번역을 아주 날로 먹어요, 아주.”
“헹- 잔소리쟁이! 네가 배가 불러서 그렇지. 저 정도쯤 되면 얼굴 훈훈해, 기럭지 훈훈해, 좀 어리하긴 해도 성격 착해. 게다가 너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 굴러 들어오는 복을 함부로 차는 게 아니야~. 누나 말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다~.”
킥킥거리며 탈의실로 들어가는 민주가 때마침 나오던 규현의 등을 툭툭 쳤다. 꽃병을 꽂힌 장미를 보고 다시 방긋 웃는 규현을 보던 려욱이 손을 뻗어 규현의 볼을 쭈욱 잡아 댕겼다. 손 한 번 못 잡은 규현의 입장에서 매우 감격스런 스킨십이었지만 려욱의 손이 매운 터라 결국 울상을 또 짓고 있었다.
왜 이러냐고 물으려는데 마침 나가던 손님 덕에 려욱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규현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규현은 큰 소리로 불평했다간 려욱이 정말 화날까 봐 무섭기도 하고 처음 한 스킨십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래서 군대 제대하고 함부로 아무나 만나면 안 된다는 선배들의 충고가 있었나 보다….
#1-3. 공주님에겐 비밀이 있었습니다
어느새 거리의 가게 불이 하나 둘씩 꺼져간다. 어느새 시계는 10을 향해 짧은 바늘이 향해 있었다. 손님 한 명 없이 휑한 카페 안을 보던 규현이 청소를 하다가 려욱을 돌아보니 카운터 근처를 정리하고 있었다. 같이 갈 생각에 신이 나서 밀대를 슈욱 슈욱 밀며 가게 안을 돌아다니다가 또 려욱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도 들떠서 웃고 있는데 딸랑, 하는 소리에 규현이 미간을 좁히고 확 노려보았다.
“헉. 반사.”
“뭐야- 혁재 형? 왜 왔어요?”
“허어- 뭐야라니. 뭐, 별 건 아니고 할 말 있어서 왔지. 려욱이 너, 내일 잊어먹진 않았지? 성민이 형 돌아오는 날이잖아. 그래도 하나 뿐인 형인데 왠만하면 나가서 마중 좀 해주지. 너 얼마나 챙기는데. 안 됐잖아.”
“……-알아….”
갑자기 차분해진 려욱의 말투에 혁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 언뜻 보기에 려욱은 별 표정이나 감정의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규현은 려욱의 분위기가 가라앉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변화가 다른 사람만하지 않을 뿐 려욱은 속으로는 어쩌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감수성이 풍부할 지도 모른다. 그 변화를 이끌어 낸, 전화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왜 헤어졌을까. 물어도 입을 다문 채 대답해주지 않던 질문만큼 아직 규현이 려욱에게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내일 몇 시에 온대요?”
“아마 오전?”
“그럼 그때 잠시 시간 비워서 쉬면….”
“규현이 안 가니?”
“예? …아, 예…….”
규현이 탈의실로 주춤거리며 들어갔다. 처음 듣는 날카로운 어조에 저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혁재 역시 놀란 표정이다. 신경질에 날이 선 목소리라니. 이제까지 알던 려욱의 평온한 목소리와 다르다. 규현이 옷을 갈아입고 인사하고 나갈 때도 려욱과 혁재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규현이 나가자 혁재가 입을 뗐다.
“피한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니잖아. 거기다 너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겁나는 거야.”
“-… 어차피 알아서 잘 찾아올 사람인데, 내가 왜 나가봐야 해? 다시, 그 집에서, 둘이서 지내야 하는 그 생각만으로도 숨막히는데.”
“너 설마…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해야 돼?”
그대로 탈의실로 들어간 려욱을 보던 혁재가 고개를 저었다. 려욱이 저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어쩌다 둘이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얘기를 들어보면 두 사람 사이에서 ‘그’만의 잘못인데도 남은 사람의 사이가 비틀어져야만. 혁재는 이 꼬인 매듭을 풀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엉킬 것 같은 예감에 무기력한 자신이 한심해졌다.
#1-4. 공주님에겐 예쁜 상자가 하나 있었지요
공항을 빠져 나온 성민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수많은 플랜카드와 얼굴 속에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결과임에도 성민은 섭섭해졌다. 오랜만이니까 얼굴 한 번쯤은 비춰줘도 좋을 텐데. 성민은 선글라스를 다시 꺼내 썼다. 택시기사가 짐을 싣는 동안 앞 좌석에 앉은 성민은 반가운 풍경조차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곧 성민이 탄 택시가 매끄럽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1-5. 비밀이 담긴 예쁜 상자는 꼭 닫혀 있습니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서 열쇠로 문을 연 려욱이 들어서자 현관등이 켜졌다. 소파에 앉아있던 성민이 일어났다. 늘 그랬던 미소에 려욱은 옅게 웃음으로 답했다. 려욱에게 다가와 그를 꼭 끌어안은 성민이 놓지 않고서 귓가에서 소근거렸다.
“이제 와? 기다렸어.”
“…형이 학회 때문에 바쁠 까봐… 마중 못 나갔어….”
“그래…. 형은 려욱이 믿어…. 려욱이는 형이 제일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끌어 안았던 몸이 떨어졌다. 려욱을 보던 얼굴에 비추던 빛이 사라졌다. 현관등이 꺼졌기 때문이다. 어둠에도 까맣게 빛나는 성민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려욱이 미소를 짓고 성민을 밀어냈다. 쉬라는 말과 함께 욕실로 려욱이 들어가고 성민도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까지 어둠에 묻힌 거실에 잠시 존재하던 목소리조차 없어지고 시계 초침소리와 함께 물줄기 소리만이 흘렀다.
#0-1.
빵을 뜯고 있는 려욱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난 좋아.”
“려욱아-…. 정말 고마워…!!”
“나도 아빠 갖고 싶고. 엄마만 좋자고 하는 거 아니고. 그리고 그 아저씨 저번에 보니까 착하고 좋았어. 게다가 형까지 생기면, 상품이 엄청 푸짐한 거 아냐? 타임세일에 뛰어다니는 것보다 훨 낫네.”
“려욱아~!!”
자신을 꼭 안으며 좋아하는 어머니를 보고 있으니 새삼 단어선택에 감탄했다. 사실 아무 생각도 없다. 아버지가 생겨서 기쁜 것도, 형이 생겨서 기쁘지도 않다. 어머니한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가끔 아버지 불평을 하는 아이들을 봐도 정말 아무 부러움도 없었다. 남이 바라는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려욱은 어머니의 등을 남은 손으로 두들겨 주다가 학교에 가야겠다며 밝게 인사하고 집에서 나왔다.
덥다. 아침임에도 따갑게 내리는 햇빛에 얼굴을 절로 찌푸리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멈칫 했다가 무시하고 걸었다. 어깨가 잡히고서 돌아보자 험악한 인상의 남학생이 서 있었다. – 운동장을 같이 쓰는 같은 재단의 남고 교복이다. 목덜미가 잡혀서 골목으로 끌려들어가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야!!”
“-!”
결국 뒷통수 한 대 크게 맞았다. 울상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고 붙들려 가는데 담배 냄새에 참으려 애쓰다가 고개를 돌리고 기침을 했다. 눈물이 나도록 기침을 하다가 고개를 드니 유독 무리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하얀 얼굴과 어울리는 하얀 운동화, 그리고 하얀 담배연기…. 담배 연기에도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목덜미가 흔들리고 자신의 처지를 다시 깨달았다.
“가진 돈 다 뱉어.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다. 알지?”
“으, 으…….”
“…그냥 보내줘.”
“!!!”
보내주란 말보다 목소리에 놀랐다. 얼굴에 걸맞게, 아니 그보다 훨씬 예쁘다. 려욱은 그렇게 정의했다. 그는 예쁜 사람이다- 라고. 멋진, 잘 생긴, 아름다운 같은 수식어보다 예쁘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저도 모르게 감격해서 바라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담배를 운동화로 비벼 끈 그가 다가와 볼을 툭툭 두드리며 찡긋 웃었다.
“젖비린내 나는 돈을 뺏을 수야 있나. 얼른 가 봐. 엄마 젖 더 먹은 후엔 좀 조심하고.”
“!!!”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왜 그리 모욕적으로 들렸는지 몰랐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벌개진 얼굴로 달아났다. 다행히 지각은 하지 않았지만 려욱은 그 날 종일 선생님께 불리고 깨지는 이상한 하루를 겪었다.
#0-2.
려욱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폴라티가 목에 답답하다. 교복 셔츠를 입을 때도 한 개는 항상 풀었는데 격식을 차려야 한다며 어머니의 끈질긴 주의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옷이었다. 카운터에 말하니 웨이터가 안내하는 자리로 따라갔다.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새 아버지가 될 아저씨를 보고 인사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고 려욱은 놀라서 감탄사를 크게 내고 말았다. 당황한 어머니가 붙잡아 앉히자 아저씨가 의아한 듯 말을 꺼냈다.
“둘이…만난 적 있어? 하긴, 같은 재단이니까. 이쪽은
“예. 반갑다. 우리 두 번째로 보는 사이지? 이름이 특이해서 어머니께 여쭤보니까, 고울 려에 아침해 욱이라며? 예쁜 이름이다. 잘 어울려.”
“아, 안녕, 하세요….”
려욱의 존댓말에 성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씩씩하게 내민 성민의 손이 무안해질쯤 살짝 악수하고 떨어지는 려욱의 손을 보던 성민이 씨익 웃었다. 둘의 어색하지만 다정한 분위기에 그들을 보던 각자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둘 다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만나기 어려웠을 텐데.”
“아- 그게-“
“형이 절 구해줬어요!!”
대뜸 큰 소리에 아저씨와 어머니 모두 놀란 표정이다. 려욱의 외침에 아저씨와 어머니와 같이 놀란 표정을 지은 성민이 다시금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발개진 려욱이 고개를 푹 숙이자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형이라고 부르다니 려욱이가 꽤나 새 형이 맘에 든 모양이라며 아저씨와 어머니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성민은 처음 본 그 때처럼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천사처럼.
#2-1.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오니 빛이 한가득 거실에 쏟아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베란다 문을 열려는데 이미 열려 있었다. 성민이 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일어났어? 밥을 못 해서 간단하게 준비했는데.”
“아- 아냐. 고마워.”
햇빛을 받으며 기지개하던 습관도 잊고 화장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다시 꽂혀진, 칫솔에 려욱은 성민이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같은 쪽으로 뉘여 진 칫솔을 일부러 떨어뜨려 엇갈리게 두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담겨 있는 것까지 피할 수 없다. 자신과 성민의 사이는, 어쩌면 이 칫솔 두 개 같은 느낌이 아닐까. 피해야만 하는 사이지만 아무리 피해도 그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찬물을 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는데 차가운 물보다 좋은 것은 없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오니 식탁 위에 식빵, 우유 따위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으니 성민이 마주 앉았다.
“미안해-. 형 요리 실력 꽝인 거 알잖아. 이해해 줄 꺼지-? 응? 려욱아-.”
“웩-. 애교 그만 떨어. 어차피 굶는 거 보다야 낫지. 형 오늘 약속 있어?”
“너무해-. 형은 려욱이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는데. 나, 삐친다?! 음- 형 오늘, 교수님이랑 만나기로 했어. 어제 학회 논문 점검했는데, 며칠간은 계속- 해야 될 것 같아. 그리고 일자리 구했다? 프랑스 쪽 외교 문서 번역 좀 해달라는 거 있지-?”
“와- 정말? 대단하다. 역시 형이야.”
감탄을 하며 대화를 주고 받는데 문자 수신음이 끼어든다. 무시하고 밥을 먹는데 또 들리는 수신음에 빵을 억지로 깨 물었다. 애교 떠는 형과 그 애교를 받아주는 동생, 언뜻 친형제 같은 대화에 단지 다른 것은 껍데기뿐인 대화라는 점일까. 빵을 다 먹고 방으로 들어가는 려욱을 보던 성민의 표정이 금새 사라졌다. 려욱이 앉았던 자리에 그릇이 없다면 혼자 있었다고 해도 누구나 믿었을 것이다.
방에 들어온 려욱은 문자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규현이었다. 빨리 보고 싶다며 하트 문자가 가득 담긴 두 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었다. 규현은- 마치, 향수 같은 존재였다. 뿌리는 순간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향수. 너라면, 사귀고, 헤어져도- 웃으며 보낼 수 있을까. 이번만은, 그럴 수 있을까. 려욱은 금새 우울함을 느꼈다.
문을 열자 보이는 얼굴에 당황한 것은 성민 뿐이 아니었다. 려욱은 뒤에서 마중 나오는 성민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규현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려욱이 형 애인될 예정인
“아- 저- 이, 쪽은 우리 형…. 성민,
“반가워요. 려욱이 형 되는
내미는 손에 맞잡은 규현이 물음표를 띄고서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러다 불현듯 의문을 풀었는지 알겠다는 듯 입을 떼었다.
“외사촌인가 봐요! 굉장히 닮으셨네요!! 이름 말씀 안 하시면 친형제라고 해도 믿겠어요!”
“예?”
“- 야!!
곧 문이 닫히고 투닥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성민은 현관에 멈춰 서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닮았다는 그 말 한마디에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는 모습이라니. 간만에 크게 웃은 성민은 자리에 주저 앉아서 계속 웃다가 웃음을 멈추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 그렇지. 닮아야지.
#3-1.
려욱은 팝콘을 쥐어 먹으며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손은 팝콘을, 오른손은 계속 먹는데 바빴기에 규현은 눈물을 삼키며 이 데이트를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벅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공포 영화를 본다고 무딘 사람이 무섭다고 달려드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손 한 번쯤은 잡게 해줘도 좋지 않느냐 말이다.
저번 아침에 당황하는 표정 본 걸로 만족하란 거야? 정말 너무한다, 너무해. 려욱은 규현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무시하고 열심히 팝콘을 먹는데 진동이 울린다. 그제야 쥐고 있던 팝콘을 다 먹고 핸드폰을 꺼내니 액정에 ‘형’- 단 한마디가 뜨고 있었다. 배터리를 빼고 주머니에 넣어버리자 규현이 귀엣말을 속삭인다.
“왜요? 나하고 영화 보는 게 그렇게 좋아요?”
“너-…….”
쓰윽 돌아보며 째려보니 흠, 흠 하며 미처 팝콘을 잡지 못 한 손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냐며 말하려다 불평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별 수 없이 손이 잡혀서 영화를 끝까지 보고 말았다. 영화를 마치자 마자 려욱이 규현을 쌩 까고 나가 버렸다. 뒤좇아 온 규현은 눈치만 보다가 영화관 앞에서 겨우 려욱을 잡았다.
“손 한 번 잡은 게, 그게 그렇게 싫어요?”
“…….”
“그럼 어떡해요. 형 보면 만지고 싶고 끌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데. 저 여기서 고백이라도 해요? 그래야 한 번- 어디가요!”
“닥치고 따라 와!!! 어휴, 남 부끄러워서 정말!!!”
손목을 잡혀서 끌려간 곳은 분식집이었다. 기껏 사람 죽일 듯한 기세로 데려오는 곳이 겨우 분식집이라니, 허탈해서 비웃을 기운도 없다. 자리에 앉은 려욱이 젓가락을 놓아 주었다. 떡볶이, 순대, 김밥 등을 조금씩 시키고 기다리는데 규현이 괜히 입을 삐죽거렸다.
“형 때문에 맨날 닭 좇는 개 신세 되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까 무섭네요.”
“어이구- 그거 때문에 삐쳤어요? 많이 먹어, 오늘은 내가 살게.”
“겨우 분식집에 와 놓구선…. 누가 보면 음~청 비싼데 데려온 줄 알겠다, 쳇….”
“이게. 너 지금 내가 너보고 닦달 안 하는 것만도 감사해야지. 어?”
“려욱아!! 너 핸드폰 배터리!”
“아, 맞다. ……너, 은근 말 놓는다?”
대답 없이 방긋 웃는데 배터리를 끼운 핸드폰의 폴더를 열고서 려욱이 멈칫했다. 켜지 않고 그대로 닫는 행동에 규현이 물었다.
“그 성민이라는, 형 맞지? 왜 저번에 형 집에 있던. 걱정할 텐데, 연락 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무슨 어린애야. 걱정하고 말고 하게. 너 그리고 자꾸-“
반말 쓰지 말라고 핀잔을 주려는데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말이 막혀버렸다. 그대로 신나서 먹기 시작하는 규현을 보며 려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려욱이 계산을 하고 나오자 규현이 불쑥 사탕을 내민다.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입술에 깐 사탕을 쿡쿡 눌러댄다. 주변 사람들 시선에 빨리 받아먹어 버리는 려욱을 보고 규현이 씩 웃었다.
“내가 주니까 더 좋지?”
“…흠, 뭐- 그런 것 같기도?”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뭐 잘 못 먹었냐, 머리 어디 크게 부딪혔냐- 따위의 빈정거림을 예상했는데 의외의 말에 놀란 것은 규현이었다. 어느새 거리로 사람들 사이에 섞이려는 려욱의 팔을 붙든 규현의 놀란 표정에 려욱이 규현을 잡아 끌어 팔짱을 꼈다.
나이쓰,
성민이다. 은빛 에쿠스에 기대어 자신 쪽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 규현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걸 알았을까? – 팔짱을 낀 려욱의 몸이 슬몃 떨린다고 느끼는데 어느새 려욱이 자신과 떨어진다. 손을 흔드는 성민의 장난스런 미소에 려욱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규현은 려욱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형인데, 싶어서 그대로 려욱의 손을 잡고 성민에게 걸어갔다. 묘하게 빼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성민의 앞에 서자 려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형이 이런 곳까지 나오고.”
“친구 찾기. 혁재한테 물어서 왔어. 내 번호 떴는데도 핸드폰 꺼서, 엄청 큰일 생긴 줄 알았잖아. 내가 얼마나 널 걱정하는데. 규현씨라고 했죠? 제 동생 챙겨줘서 고마워요. 제가 데리고 갈 테니까 들어가세요.”
“예-.”
“……아직 안 사귄다고 했었죠?”
“예.”
“전 어때요?”
“……예?”
그대로 손을 잡아 끌어 조수석에 려욱을 떠민 성민이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며 규현에게 말했다. 규현은 성민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다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 규현은 농담이길 바랬지만 그렇지 않았다. 곤란한 듯 웃자 성민도 그대로 미소 짓고는 차에 올라탔다. 곧 도로 쪽으로 가는 차를 보고 규현은 머리를 긁적였지만 곧 근처의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차 안에는 특별히 음악조차 없이 조용했다. 뭐든 틀면 좋겠단 생각에 버튼을 누르려 뻗은 손가락이 잡혔다.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 껴 잡아오는 손을 내려보고 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귈 거야?”
“누구.”
“규현이란 사람.”
“- 형한테 말할 이유 없어. –윽….”
갑자기 힘을 가해 오는 손에 빼내지도 못 하고 신음을 흘리고 성민을 노려보았다. 눈길조차 없던 성민이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이유는… 이미 충분할 텐데?”
“-….”
고개를 돌렸다. 스치는 창 밖을 보니 시원이 떠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자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잘 들어가란 규현의 메시지에 창 밖만을 보던 려욱이 겨우 바람 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런 려욱의 반응을 하나하나 성민이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 하고.
#0-4.
려욱이 자리에 앉자 성민은 벌써 일어나 가방을 매고 있었다. 오늘도 늦잠을 자서 성민과 함께 가지 못 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데 어느새 현관에 나서기에 부랴부랴 좇아갔다. 배웅하는 어머니 옆에 서서 성민이 신발을 신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뭐라뭐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다 똑 같은 내용이다. 밤길 조심하라는 둥, 스트레스 받지 말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둥, 늘 하시는 말씀.
성민은 이미 담배도 피는 불량학생이라 밤길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생각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성민이 곧 허리를 펴고 려욱의 머리를 흐트렸다.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려욱이는 좀 일찍 일어나고.”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여- 바보.’라고 말하는 표정에 려욱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대로 성민이 나가자 아직도 형한테 부끄럼 타냐는 어머니의 놀림에 괜히 삐친 척 식탁에 가 앉았다.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서자 아직도 해가 고개만 빼쭉 올리고 있다. 학교가 도로 근처에 있어 위험하단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동안 요령 있게 잘 다녔기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달려오는 차에도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사고로 려욱은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 달리는 것은 무리라는 진단을 받았다. 뛰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니 괜찮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서글펐다. 성민과 더 이상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그 실망감이 쏟아질 사람들의 시선보다 아팠다.
#0-5.
성민은 시원이 점프하며 슛팅하는 것을 보았다. 시원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들어가는 농구공을 보고 배싯 웃었다. 땅에 앉아 손바닥을 턱을 괴고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시원이 제자리서 공을 튀기다가 성민에게 던졌다. 날아드는 공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얼굴에 박고 시원을 확 노려보니 웃음을 터뜨린다.
“진짜 강아지 같아-
“흥. 꼬리라도 흔들어 주길 바래?!”
“꼬리보다는… 엉덩이가 좋겠는데.”
“즈어지일~.”
일부러 말을 길게 늘이고선 발딱 일어나 공을 다시 시원에게 패스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꽤 늦은 시간이다. 슬슬 돌아가려고 하는데 시원이 성민의 팔을 잡아 키스했다. 자연스럽게 찾아 드는 혀에 목을 끌어안았다. 한참 그러고 서 있다가 다시 착신음이 들리고 몸을 밀어내려는데 고집스럽게 놓아주지 않는다. 떨어진 후 밉지 않게 노려보면서 팔을 툭 쳤다.
“맨날 하는데 또 하고 싶어?”
“아예 내 옆구리에 끼고 싶다. 계속 쳐다보고, 키스하고, 안고….”
“못 말려-. 그만 갈게. 동생이 혼자 집에 있는데 심심한가 봐.”
“그러지 말고 나중에 한 번 소개나 시켜주라. 엄청 귀엽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우리 성민이 발끝에도 못 미치겠지만 말야.”
그대로 웃으며 강당을 빠져 나왔다. 성민은 시원이 좋았다. 아무 때나 진중한 성격도 좋았고, 그럼에도 썰렁한 것도 좋았고, 잘난 척하는 것도 잘나 보였다. 사랑은 아니었다. 시원을 봐도 성민은 설레는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시원이 고백했을 때 놀라긴 했지만, 특별히 나쁠 것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받아들였다. 때문에 시원이 성민에게 조급함을 느끼는 것과 달리 성민은 그를 친구 같은 연인으로 생각했다.
성민은 시원을 보면 려욱을 생각했다. -사고 전이나 후나 밝은 성격이었지만 성민은 그렇기에 더 신경 쓰였다. 괜히 저러는 것 아닐까 의심했고 어떤 것이라도 부족할까 신경 써 주었다. 웃는 모습에 같이 안도하면서도 한 구석이 늘 시렸다.
시원은 그런 성민을 안정시켜주는 존재였다. 불안을 재워주고 웃게끔 만들었다. 성민이 시원에게 갖는 신뢰는 컸다. 그리고 며칠 후, 둘을 서로에게 소개 시켜주었을 때에도 성민은 믿었다. 시원은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연인으로, 려욱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스런 동생으로 남을 것임을.
#4-1.
또 성민이다. 어떻게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냐 물으니 려욱이 가르쳐 줬다는 대답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락을 했다. 아무래도 미래의 연인님의 형님이시니 왠지 섭섭하게 대해도 안 될 것 같고. 규현은 한숨을 푹, 쉬고는 답장을 꾹꾹 치고 바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서빙 후 바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보이는 괴로운 표정에 려욱이 이마를 톡- 가볍게 쳤다.
“무슨 일이야? 우리 슈퍼울트라급으로 명랑 활발한 규현이가.”
“휴…. 진짜 확 쳐낼 수도 없고, 미치겠다. 내가 이렇게 매력이 많은 사람인가?! 형이 보기에도 제가 그렇게 매력적이에요?!! 근데 왜 형은 안 넘어와!!”
“갑자기 왠 왕자병?”
“그, 성민씨 있잖아요-. 자꾸 연락하는데. 미치겠어요, 진짜.”
‘성민’-이란 말에 컵을 정리하던 손길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활발하게 움직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에 괴로움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는 중인 규현은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계산하는 손님을 상대한 후 려욱이 규현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지 말구 한 번 만나보지 그래-. 성민이 형 꽤 괜찮아. 매력있구. 예쁘구. 능력있구.”
“-…진심이야?”
대뜸 심각해지는 표정에 려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진심이 아니면 무엇인지 되묻는 려욱의 시선에 규현이 어이가 없어 이를 빠득 갈았다.
“장난해? 내가 누구한테 반했는지, 누구 원하는지, 뻔히 알면서. 그리고 내가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그건 성민씨한테도 잘못된 거야. 누군가의 ‘대용품’인 연인 관계가 행복할 리 없잖아. 내가 원하는 건 너야. 비슷한 그 누구도 아닌 김려욱이야.”
“……-야, 주문 받아.”
진짜 분위기 좀 맞춰 달라고 불평하는 규현을 보낸 후 려욱은 흘끗 장미꽃이 꽂힌 꽃병을 보았다. 매일 관리를 열심히 하는 덕에 아직 다 말라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만은 내가 최선을 다 하면, 너랑 나, 잘 될까. –려욱은 주문을 받으며 접대용 미소를 날리는 규현을 보며 생각보다 규현이 어리한 성격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물론, 그 생각도 주문을 받고 돌아오던 규현이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접어버릴 뻔 했지만.
덕분에 화가 난 규현은 ‘나 삐쳤소’를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써놓고 하루 일을 끝마쳤다. 혁재는 들어오다가 ‘반사’를 외쳤지만, 덩달아 려욱도 싸늘한 표정으로 물품 정리 해야 된다며 규현을 쫓아내 버렸다.
“이야- 이런 싸늘한 분위기, 조오치 않아요~.”
“시끄러.”
“김려욱이 성민이 형 말고 다른 사람한테 반응 하기도 하는 구나.”
툭 뱉어진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혁재는 자신이 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돌아오는 길에 당분간 소소한 매상이 없을 것 같단 예감에 혁재는 슬펐다.
#0-7.
가볍게 입술이 맞부딪혔다. 더운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터라 거실은 차가운 에어컨의 냉기가 가득 가라앉았다. 몇 번 가볍게 더 입술을 부딪히다가 혀를 섞었다. 허리로 다가오는 손길에도 반항 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키스에 열중하는 척 하면서 성민이 자다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방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성민은 멍하니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삐쳐 있었다.
성민과 잠시 눈이 마주치고 려욱은 눈을 감았다. 고개를 슬며시 뒤로 젖히니 시원은 더욱 집중하며 고개를 숙였다. 티셔츠 안 쪽으로 올라가던 시원의 손을 보던 성민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
“-…!”
“어떻게, 네가, 어떻게…….”
말을 잇지 못 하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 란 말만을 반복하던 성민이 문을 거칠게 닫아 잠궜다. 끔찍한 하루다. 시원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 실수였을까. 아니면 려욱을 소개시켜 준 자신의 잘못일까. 거부하지 않던 려욱이 야속했다. 성민이 시원과 사귀기 시작할 때, 주변의 염려를 많이 받았던 점은 시원이 상당히 편력이 심한 것이었다. -성민과 사귀면서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배신에 치가 떨렸다. 반항 없이 시원의 키스를 받고, 자신을 외면한 려욱이 미웠다.
자신이 어떻게 려욱을 보살피고 아껴왔는데, 친동생보다 더 위하고 대해줬는데. 시원의 유혹을 당연히 뿌리칠 줄 알았는데, 어째서. 려욱이 자신을 누구보다 의지한다고 믿은 것은 거짓이었을까. 부정의 말, 외침 하나 없이 자신을 보고도 외면할 수 있었는지. 성민은 목이 쉴 정도로 울었다. 가장 사랑한 동생에게서 받은 배신의 상처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되었다.
#4-2.
가게 문을 잠그는데 클랙션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성민이 운전대에 기대 려욱을 보고 있었다. 늘 생각하지만 성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배신했음을 알고도 거의 모든 것에 있어서 예전과 비슷했다. 어떤 사람이 보아도 친형,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을 위해주고 아껴주었다. 단 하나, 려욱이 사귀는 애인을 뺏는 것만을 제외하면. 혁재는 그 모든 과정을 봤기 때문에 려욱에게 성민의 소식을 전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우리 공주님 납치 당할까 봐, 형이 데리러 왔어요~.”
“납치는 무슨…. 내가 무슨 어린앤가.”
입을 삐죽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려는데 성민이 자신에게 몸을 기대 벨트를 잡았다. 가까워진 얼굴 거리만큼 자신의 얼굴이 성민의 눈동자에 비쳤다. 뒤로 고개를 젖히며 긴장했다. 억지로 얼굴 근육을 풀려는데 성민이 홱 멀어져 벨트를 매주었다.
“키스할 때 날 보고 외면하던 눈동자, 그대로니까.”
“…….”
아직도 성민은 시원을 지워내지 못 하고 있다. 첫사랑은 대단한 거로군- 새삼 감탄하면서 눈을 감았다. 다시 성민과의 집으로 납치되는 이 끔찍한 상황에 이젠 익숙하다. - 마녀에게 붙잡힌 공주 같다. 눈을 뜨고 바깥 풍경을 보는데 핸드폰 수신음이 들렸다. 규현이다. 전화를 받으니 버럭 고함 소리가 들렸다.
[“왜 문자 씹어!!! 너 그러다 나 놓치고 후회한다?!??”]
“……누구세요. 나는 너 모르겠는데요. 닥치고 꺼져 주세요.”
[“형- 너무해요 진짜!!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형 진짜 제가 형 좋아하는 거 다 알면서!! 계속 그러면, 저 진짜로 카페 창문에다 안 지워지는 페인트나 락카로 확-!!”]
“-야! 너 신고할 꺼야! 그러기만 해봐!!”
[“그러니까 형도 나한테 그만 그래요. 왜 남의 진심을 무시하려고만 해요. …이번엔 형이 확실히 잘못했으니까, 나 앞으로 형한테 반말 쓸 거예요. 알았어요?”]
“어휴, 맘대로 해. 맘대로!”
[“려욱아!! 사랑한다~ 잘 자!!!”]
옵션으로 뽀뽀해대는 소리까지 넣어대는 규현을 무시하고 폴더를 닫았다. 닫고서도 어이가 없어서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는데 이내 방방거리는 문자가 들어온다. 무시하고 핸드폰을 집어넣고 성민을 보니 여전히 운전에 집중하고 있다. –규현에 대해서 설명을 붙이려는데 성민이 심심하냐며 라디오을 틀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4-3.
아이스크림을 사온 규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꼴랑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줄을 선 것도 맘에 들지 않았고, 더운 날씨도 싫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질러대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기말고사가 끝난 건 규현인데 왜 같이 놀아야 하는 건지. 그것도 이런 여름날에 굳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인 놀이공원(그것도 야외로)에 끌고 온 거냐며 사온 아이스크림을 규현의 얼굴에 박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 온 성의와 날도 덥고 해서 꾹 참고 먹고 있는데 규현이 려욱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먹어 버렸다.
“야!! 이게- 사왔으면 그냥 가만 있을 것이지… 죽을래?!”
“억울하면, 내 꺼. 자.”
선심 쓰는 듯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보니 혀로 삭삭 핥아져 있는 게, 먹어봤자 규현의 침만 잔뜩 섭취할 것 같다. 뭘 바라겠어- 고개를 돌려 버리니 규현의 실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몰라? 간접키스잖아!! 간.접.키-!! 윽! 야!!”
“그래. 너 혼자 간접키스 실컷 해. 하, 더워 죽겠네….”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콘을 입에 확 박아 주니 조잘거리던 입이 불평을 뱉어내며 화장실로 좇아 들어온다.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물기를 대충 닦아내는데 규현이 손수건을 내민다. 받아 들고 닦으니 빨아서 돌려달라는 말에 한 번 얼굴에 던져줬다. 악- 야!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으면서 혀를 쑥 내밀었다. 더운 여름에 야외 놀이공원 데려 온 벌이다, 새꺄.
그러고 보면 성민도 아이스크림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그것도 초코렛 맛.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모든 근심이 풀린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성민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역시- 너도 좋지? 놀이공원은 진짜 남녀노소, 누구나 해피하게 만드는 마법의 성인 것 같아~!! 진짜 웃는 거 몇 년 만에 보는 것 같다. 헤헤헤.”
“-…….”
왜, 성민을 생각하고, 웃었을까. 지금 규현과 함께 있는데, 성민은 잠시 밀어내도 좋은데. 골똘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규현이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 태운 놀이기구는 관람차였다. 성민을 생각하느라 줄을 서고 있는 것도 몰라서 말리지도 못 했다. 타자마자 움직이는 기구에 고소 공포증인 것 고백도 못 하고 주먹만 꼭 쥐고 있는데 밖을 보던 규현이 입을 열었다.
“진짜, 관람차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짱이야. 세상이 다 조그맣게 보이니까.”
“-꼭, 장난감 같지….”
“와- 너도 그 생각 했어?! 진짜 그래!! 그래서 관람차 좋아하잖아! 왠지 세상을 해탈해야 할 것 같달까~. 고작 저런 것들에 집착하며 살아야 할까~ 뭐 그런 거!”
「꼭, 세상이 장난감 같아…. 너무 신기하지? …려욱이하고 보니까 더 예쁜 것 같다.」
내가 왜 그때, 그랬을까… 형. 미안해, 성민이 형. 그러지만 않았으면 우리 둘 사이, 지금보다 훨씬, 아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내 줄 수 있었을 거야. 아니, 형… 난 형한테 지금도 모든 걸 줄 수 있어. 형이 원한다면, 난, 내가 가진 모든 걸…….
“-…….”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려욱의 옆 모습을 보던 규현이 조용해졌다. 려욱에게서 저런 반응을 끌어내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혁재가 말하던 시원일까? 시원이 비틀어버린 저 형제의 관계는 영영 풀리지 않는 걸까? 그러면 시원의 자리를 평생 자신이 대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규현은 계속 려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려욱은 옆 눈길로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5-1.
놀이공원에서 돌아오는데 동네 근처부터 손을 잡고 걷고 있는데 규현이 손을 계속 주물거린다. 징그럽기도 해서 그러지 말라고 핀잔 주려는데 어느새 아파트 쪽 놀이터에 도착했다. 가라고 하려는데 손을 잡아 끌어서 그네 쪽으로 데려간다. 억지로 앉히고서 그네를 밀어버려서 당황한 려욱이 끈을 꼭 잡았다. 재밌냐며 웃으며 그네를 미는데 철부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은 좋다.
“형- 려욱아- 김려욱아- “
“너 자꾸 내 이름 함부로 부를- 끼야-“
“끼야래~. 큭큭큭. 재밌어? 더 밀어줘?”
“나 내릴래- 그만해- 야아-“
밀어주다 규현이 실수로 려욱의 등을 밀어버리자 비틀린 방향으로 움직이던 그네에서 려욱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른다. 그네를 너무 오랜만에 타서 그런지 너무 생소해서 끈만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데 갑자기 멈추었다.
“어-….”
“김려욱.”
규현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올려다 보다가 괜히 어색해져서 왜 또 이름은 부르냐며 핀잔을 주려는데 갑자기 규현이 입술을 대 온다. 베이비 키스에 더 하려는 말도 잊고 멍하니 있는데 떨어진 규현이 씩 웃는다.
“네 입술 저작권, 이제 내 꺼다.”
“-뭐, 야!! 너 죽을래?! 이게!! 맞아야 정신 차리지!”
“맞아 죽어도 좋으니까-“
주먹으로 어깨를 내려치는데 허리를 껴안는다.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로 규현의 품에 안겨 있다가 밀어내려는데 더 꽉 안아 버린다. –너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면 지금의 나를 버릴 수도 있을까. 헛된 기대임을 알면서도 규현의 등에 팔을 둘렀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꽤나 빠른 박동수가 달리기하는 것 같다.
“김려욱한테는 맞아 죽어도 좋으니까….”
“규현아.”
“응.”
“너, 있지…….”
- 정말 날 좋아하니.
#5-2.
신발을 벗고 거실에 발을 들여놓는데 소파에 성민이 앉아있다. 불도 켜지 않고선- 스위치를 누르니 달칵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거실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불이 켜지는 동안 무표정이던 성민이 려욱을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규현씨랑 재미 있었어?”
“-또 혁재지. 정말….”
“왜, 형은 려욱이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다가와 턱을 만지작 거리는 성민을 보던 려욱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런 려욱에게 눈 깜짝 안하고 쳐다보던 성민의 손끝이 려욱의 입술에 닿았다. 아랫입술을 촘촘하게 만지는 손가락에도- 려욱은 반응하지 않았다.
“키스도 했어? 이 입술에…….”
“-나 씻을게. 형도 그만 자.”
언뜻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성민은 놓치지 않았다. 대답을 회피했다. 거실에 남아있던 성민은 왠지 모르게 속이 뒤틀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속에 들어와 뜨거운 물을 붓고, 헤집는 기분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제대로 대답했다면 이토록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거칠게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려욱과 함께 있으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성을 잃은 모습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5-3.
혼자서 몇 병 마신지도 모르고, 계산을 했는지도 모른 채 인사불성이 되어서 엎드려 있는데 누군가 자신의 몸을 흔들다가 일으킨다. 무너지는 몸을 누를 기세로 기대고서 길을 걷는데 기분이 좋기도 하고, 속 상하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하다.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뚝,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다. – 낮까지만 해도 맑은 하늘이었는데 지금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이 자신의 얼굴 위에 아프게 물방울로 내리고 있다. 옆에 있는 누군가도 무시하고서 비를 맞고 있었다. 자신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반대편 허리를 더 강하게 부축해 오는 상대를 보았다. 처음으로 만난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보자 고개를 돌린다.
- 려욱이야…?
빗물에 묻힌 소리가 들렸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왜 이렇게 술을 잔뜩 마셨냐며 잔소리를 하는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길가는 어느새 어둠에 잠겨 가로등만이 드문드문 길을 비추고 있었다.
- 려욱아, 나, 나, 질식할 것 같아.
무슨 소리냐며 성민을 끌고 가던 려욱이 멈추지 않고 걸으며 물었다. 몸이 물을 먹어서 늘어진 건지 옷이 물을 먹으며 늘어지고 있는지 걸음이 무겁다. 울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울고 싶다. 너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게 뒤틀려서 나를 잊어버린다. 그 어떤 누구도 아닌 너만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너의 외면은 나를 밀어낸다. 어둡고 차가운 어둠에 밀어 넣고 날 질식하게 만들어, 내 동생인 김려욱이.
- 나, 숨 좀, 숨 좀 쉬게… 네가 나 좀, 숨, 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를 아이를 벽에 밀어 부쳐 키스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술인지 모를 맛들이 섞였다. 네 입술을 원한 게 아니라, 내 숨이 모자라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5-4.
감기에 걸린 려욱은 대신해 가게를 며칠 민주가 봐주기로 하고 쉬기로 했다. 성민도 미약하게 열이 났지만 해열제를 먹고 금새 내렸다. 병원에 데려가 주사를 맞히고 링겔을 꽂히려는 걸 억지로 말리고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었다. 침대 맡에 앉아서 물수건을 대주던 성민이 죽을 끓이러 나갔는데 문자 수신음이 귀에 울렸다. 무시하려는데 또 전화하면 성민이 알아챌 것 같아 억지로 팔을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혁재에게서 들은 모양인지 걱정하는 문자에 려욱은 팔불출, 이라면서도 마음이 든든했다.
띠링- 하고 또 문자가 도착했다.
[문 앞 –규현]
무슨 말이야? –슬라이드를 내리려다가 벨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저게 왜 우리 집에 와?! 새된 소리를 내려다 머리가 아파 다시 기절하듯 침대에 누웠다. 벌써부터 규현이 돌아간 후 성민이 할 소리를 걱정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규현의 눈치 없는 성격이 이런 때 써먹을 껀덕지나 있겠는가. 죽 끓여야 된다며 다시 부엌으로 웃으며 나간 성민을 보던 규현이 침대 쪽에 걸어와 털썩 앉았다. 매트리스의 균형이 쏠리는데 이마를 짚어오는 손이 따뜻하다.
“왜 감기 걸려? 난 멀쩡한데.”
“으-…. 신경 끄셔…….”
“아프긴 많이 아픈 것 같네. 일어나서 한대 쳐야 될 사람이 누워있게. …흠. 내가 감기 옮겨줄까? 원래 감기가 다른 사람한테 옮기면, 빨리 낫는대. 난 방학이니까 어디 나갈 일도 없고, 너보다 젊어서 빨리 나을걸.”
“너 무슨-“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고개를 숙인 규현이 입술을 부드럽게 맞춰온다. –순간 어제 성민의 거칠었던 키스가 겹쳐져서 려욱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려버렸다. 갑작스레 돌려진 얼굴에 규현이 당황한 듯 하더니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민이 죽을 들고 서 있었다.
“사귀는 모양이에요?”
“- 음, 뭐. 아직 사전 답사 중이죠.”
“아무리 그래도, 환자한테… 규현씨 엄청 쌓인 모양이네요.”
“예? …아-…그, 흠.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었네요. 저 그만 가볼게요. 나중에 봐, 려욱아.”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떨어진 규현이 아쉬운 듯 방문을 나서자 성민이 침대 옆 협탁에 죽을 올려놓고 배웅하러 나간다. 하필 그 타이밍에 성민이 들어와서 칼날 위를 밟는 기분을 느껴야만 하다니. 려욱은 머리가 더 지끈 거리며 아파와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사귀는 것에 무슨 원수라도 진 사람 같아, 성민이 형…. 어느새 규현을 배웅하고 돌아온 성민이 려욱을 일으켜 숟가락을 손에 쥐어준다. 잘게 썰어진 야채들이 섞인 죽을 보고 머뭇거리는데 성민이 물을 가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파서 그런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새 물을 가져온 성민이 늘 그렇듯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았다.
“규현씨랑 사귀는 거 맞네. 왜 감추고 그래. 우리 사이에.”
“- 아냐. 사귀는 거. 왜 자꾸 몰아가고 그래. 그 새끼가 나 좋다고 좇아 다니는 거지, 난 관심 하나도 없어.”
“……관심 없는 사람하고 어제 저녁 놀이터에서 키스하고 끌어안고 그래?”
“형… 봤어…?”
정말 순간적으로 머리에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서, 무심코 긍정의 말을 뱉어버렸다. 말을 하고도 아차,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성민을 보고 있었다. 어제 입술을 만질 때 표정이다. 뭔가 화난 듯 하면서, 뭔가 안타까운 듯한 눈. 아니, 그거 말고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바닷가의 모래 사이에 있는 무언가를 찾는데 성민이 픽 웃는다. 그러고 나가 버린 성민은 더 이상 규현에 대해서 묻지 않고 정성껏 려욱을 간호 해주었다. 덕분인지 이틀 정도 누운 후 려욱은 깨끗이 나아 다시 가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6-1.
혁재는 사선으로 가방을 메고 들어와서 꽃을 내밀었다. 재고로 남았다며 건네지만 그 진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성민이 신경 쓰여 문병도 못 온 것이 못내 걸려서 고민하다가 제일 만만한 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혁재가 려욱은 고마웠다. 이 위태로운 관계를 모두다 지켜보고 려욱을 지탱해준 혁재가 없었다면 려욱은 외로움과 고단함에 이미 삶의 의욕 전체를 잃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했을 때 혁재는 려욱이 아직도 뭔가 모르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 의미는 모른다.
“그런데 왜 감기에 걸린 거야? 너 규현이한테 배웅 받을 때는 비 안 왔었다며.”
“그러게 말이죠. 이상해요. 나한테 말 안 하려는 게, 혹시 다른 놈 만난 거 아닌지- 윽!”
“쬐그만 게 건방지게. 빨리 안 가?!”
오늘도 집에 같이 못 가는 거냐며 려욱이 던진 걸레를 받아 들고 입을 댓발 내밀던 규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혁재가 궁금한 듯 려욱을 향해 눈을 반짝이자 려욱이 입을 꾹 다물다가 말을 꺼냈다.
“성민이 형이- 나가서 술을 마셨는데…. 전화가 와서, 나갔어. 근데 우산을 깜박한 거 잊지. 그래서 둘이 비 맞고 왔어. 그것뿐이야. 형 진짜 대단하지. 같이 맞았는데 자긴 감기 안 걸리구. 나만 아프구.”
성민에 대한 감탄을 하며 말을 마무리 지은 려욱이 혀를 내밀었다. 무안하며 혀를 내밀며 웃곤 했는데 아직 그 버릇을 못 고쳤다. 혁재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약간 굳은 표정이 되었다. 텅빈 카페의 썰렁한 기운이 그제야 느껴져 려욱은 잠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했다. 굳은 표정이던 혁재가 려욱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만 아프진 않았을걸.”
- 내뱉는 말에 려욱이 깜짝 놀랬다. 성민이 약간 열이 나긴 했는데 그것까지 알고 있었냐며 감탄하는 려욱에게 혁재가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려욱이 기다리라고 말한 후 탈의실로 들어갔다. 오늘도 같이 못 가는 거냐며 시무룩한 규현이 나오자 어깨를 두드리며 보낸 혁재가 마침 희철의 전화를 받았다. 빨리 오라며 바락바락 외치는 고함에 규현에게 려욱을 부탁한 후 도로로 나갔다.
#0-3.
혁재는 책상에 앉아 멍한 려욱의 눈 앞에서 손을 휘휘 젓다가 머리를 두들겨보기도 하다가 몸을 흔들어보기도 했다. 앞뒤로 흔들리는 몸에 멍한 눈이 그제야 혁재를 발견한다. 초점이 맞춰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멍해지는 눈동자에 혁재가 짜증을 부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려욱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있지, 저번에 말했던 형 말야….”
“뭐? 누구?”
“있잖아. 나 구해준, 그, 잘생긴 형….”
“아- 너보고 젖비린내 난다구 했던 그 형?”
“야!!!”
갑자기 소리를 벌떡 지르며 일어서는 려욱 때문에 반의 신경이 잠시 쏠리다 흩어진다. 려욱을 알아온 이래로 이처럼 반응이 열렬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혁재는 그 알 수 없는 형이 그닥 맘에 들지 않았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묘사를 들어보니 옆 고등학교에 유명한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 형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걸까. 혁재는 다시 자리에 앉은 려욱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음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했다.
“우리 엄마, 재혼했잖아-…. 휴… 이제부터 내 형이래….”
“뭐-?!”
“나 이제, 성민이 형이, 가족이 됐다구…….”
근데 왜 이렇게 기쁘지 않을까- 하며 물어오는 려욱을 보며 혁재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희철이 경고한 이상 보통 이상의 인연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형제가 될 줄이야. 세상 좁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구나- 혁재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망설였다.
“너, 그 형…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무심코 뱉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려욱의 잔뜩 굳어버린 얼굴에 혁재는 퍼뜩 무슨 핑계를 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울상이 되어버린 려욱은 가버리라며 혁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6-2.
길을 걷던 려욱과 규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간간히 도로에 차가 지나가긴 했지만 방학이기에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려욱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자취방으로 돌아갈 작정으로 걷고 있었다. 간만에 단 둘이 있게 된 찬스였지만 려욱의 기분이 영 좋지 않아서 규현은 무슨 말을 붙이면 좋을지 망설였다. 얼마 전 네이버에서 본 붐업이라도 흉내내면 좋을까. 그랬다가 또 두들겨 맞고 냉랭해질까 겁이 났다. 허락 없이 집에 갔다가 성민의 앞에서 망신당한 후 려욱은 가게에 돌아오고도 한동안 규현을 무시했었다. 가까워지나 싶으면 멀어지고, 멀어지나 싶으면 다가오는 려욱이 규현은 못내 아쉬웠다.
[아직도, 힘들어?]
불쑥 내민 종이에 적힌 말에 려욱이 규현을 돌아봤다. 굳게 입술을 다물었지만 눈동자에 자신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어린애는 어쩔 수 없구나- 려욱은 입근육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괜찮아.”
“- 너는,”
“…?”
“너무 혼자서 모든 짐을 지려고만 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규현의 말에 려욱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밤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멀리 아파트를 보았다. 빼곡히 올린 성냥갑에 불규칙하게 불이 켜져 있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성민일까, 아니면-….
“그럴 수 밖에 없을 때도 있어. – 짐을 지고 가야 할 때가.”
“…그건-“
“그게 어른이니까.”
“뭐?”
“짐을 지는 게 아무리 무겁고,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만 하는 걸 알게 되면.”
“…….”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규현아.”
어느새 아파트 앞에 다다른 려욱이 방긋 웃고 규현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뛰어 들어가며 손을 흔든 려욱이 사라지자 규현이 입술을 콱 깨물었다.
어른이니까? 지금 그런 말로 날 떼내려고 하는 거야, 김려욱? 겨우 두 살 차이면서, 왜 그렇게 항상 다 아는 체 하면서 다 자기 것이라고 끌어들이려 하는 건데. 뻔히 네 곁에 날 세워두고, 언제든 네 곁에서 널 위하려는 날 버려두고- 고맙다는 말 하나로 달래질 만큼 널 가볍게 좋아했으면 난 벌써 널 좋아하는 짓 따위 관뒀어.
#6-3.
삐걱- 하고 열리는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규현이 대뜸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오라는지 모르겠다. 주민들 몰래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텃밭 가꾸는 것 때문에 옥상은 비밀리에 개방돼 있었다. 살며시 발을 내딛자 갑자기 쨘- 하고 나타난 규현을 보고 놀란 려욱이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여름밤의 옥상은 꽤나 서늘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막대기에 의아하게 규현을 바라보는데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온다. 파지직 거리며 타 들어가는 폭죽을 보고 그제야 규현이 자신을 옥상으로 부른 이유를 이해했다.
“놀이터에서 하면 되지…. 아님 한강에 가도 되는데.”
“어허- 그러면 이걸 못 하지요~.”
이상한 음으로 노래 부르듯 말을 한 규현이 자신을 끌고 간 곳에 하트 모양으로 조그만 양초들이 종이컵 안에서 불이 켜져 있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하트 모양의 중앙에 들어간 규현이 땅에 놓인 장미꽃을 들이민다.
“뭐야- 또 스물 네 송이?”
“아니- 이번엔 스무 송이. 혁재가 형 말로는 이거 뜻이, 나는 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얼굴이 벌개진 규현이 버럭 화를 냈다. 그새 다 타버린 폭죽을 버리고 장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어?”
“어른이라서 다 참고 지려고 하는 거 이해할 테니까, 가끔 옆에 있는 사람도 좀 보고 그래. 그 짐 나눠 달라는 거 아냐. 네 짐 나도 지기 싫어. 근데 혼자서 낑낑거리진 마.”
손을 잡아 당겨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짐을 같이 지는 건 자기도 싫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네가 과연 알게 되어도, 네가 날 사랑할 수 있을까. 내 곁에 남겠다는 지금 네 말을 네가 후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키스 후 몸이 떨어지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컵들이 흔들리더니 몇 개는 엎어지기도 했다. 혹여 불이 날까 봐 서로 꽃, 폭죽들 다 버리고 열심히 촛불을 껐다. 몇 개는 정말 컵이 타버려서 규현이 준 꽃다발은 그 불을 끄는데 쓰이고 말았다. 불을 다 끄자마자 서로 바닥에 주저앉고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웃었다.
규현은 먼저 일어나 려욱에게 손을 뻗었다. 려욱이 규현의 손을 잡는 척 하다가 힘을 줘 규현을 넘어뜨렸다. 넘어진 규현이 무슨 짓이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또 웃었다. 그렇게 재미있는지 숨 넘어갈 듯 웃는 려욱을 보며 규현은 언젠가는 려욱이 진 짐을 모두 자신이 버리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옥상에서 같이 별을 바라보며 있었다.
#6-4.
규현을 본 성민의 얼굴이 확 굳어 버렸다. 규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려욱이 먼저 선수쳤다.
“우리, 사귀기로 했어. 형도 축하해주길 바래.”
태연하게 말을 내뱉는 려욱을 보며 성민이 피식 웃었다. 그런 성민의 웃음에 깃든 눈빛에 규현은 잠시 섬뜩해졌다. 이대로 려욱을 그가 있는 공간에 들이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성민은 다시 활짝 웃어 보였다.
“와- 축하해. 두 사람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귀네-.”
“고마워, 형~.”
그대로 인사를 하고 려욱이 들어가버리자 규현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둔한 규현이지만 방금 성민의 눈동자에서 드러났던 노골적인 불쾌감의 종류마저 놓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그 눈동자가 단순히 여동생에게 애인이 생긴 친오빠의 걱정 종류라고 볼 수 있을까. 살기마저 깃들었던 그 눈이? –그러나 이제까지 성민이 자신을 유혹했던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규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경계다.
문을 닫자마자 성민은 려욱의 어깨를 잡아 벽으로 밀쳤다. 코앞까지 와 닿을 듯이 려욱을 노려보던 성민과 눈을 마주했다. 벽에 부딪히며 얼굴을 찡그리다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눈빛에 려욱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 몇 년을 봐왔지만 이토록 짜증난 표정은 흔히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규현과 사귀기로 한 게 이다지도 짜증을 불러 일으킬 종류일까. 지금까지 사귀었던 애인을 소개했을 때 성민이 이토록 화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성민은 규현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었다.
“사귀기로 했어? 나한텐 안 사귈 것처럼 말하더니?”
“-…내가 왜, 일일이, 누굴 좋아하는 것까지, 형한테 검사 받아야 하는데?”
려욱의 되물음에 성민은 그를 팔로 벽에 밀쳤던 것을 풀었다. 그제까지 가슴부근이 팔로 눌려있다가 겨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성민을 바라보자 지독하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엔 이동해 같은 종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나한테 장난감으로 던져주던 종류가 아닌 것 같단 얘기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고 다시 묻기도 전에 성민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거칠게 문을 닫았다. 이동해 같은, 이라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설마 성민이 모든 것을 알았었나.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음을. 그래서 지금과는 다르게 감추었던 자신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번에도 틀렸잖아…. 려욱은 천천히 숨을 내뱉듯 웃다가 결국 끅끅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거실에 켜진 불을 끄고 려욱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피곤한 하루다.
#7-1.
규현은 무표정으로 앞자리에 앉은 성민을 바라보았다. 성민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술집은 언뜻 보기에도 상류층의 부류를 상대하는 곳인 듯 했다. 예약했단 방으로 들어와 술만 붓던 둘 사이에서 갑자기 던져진 성민의 말- 언뜻 고백 같은 말에도 규현은 꿈쩍도 않고 그저 비어진 성민의 잔에 술을 붓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부었다. 성민이 당황하며 술병을 중간에 잡았지만 이미 규현의 잔은 가득 찬 후였다.
“규현씨는… 제 말들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요?”
“뭐가요?”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구요.”
“…-.”
규현은 이제는 멀뚱히 성민을 보았다. 저번 려욱을 데려다 줬을 때 자신을 노려보던 눈을 잊지 않았는데. 아니, 자신이 틀린 것일 수도 있잖은가. 그때 려욱이 자신을 낚아챘다고 여겨서, 화가 나서….
하지만 규현은 이도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애초에 타인의 감정을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그나마 믿었던 감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자신을 원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남자. 사실 언뜻언뜻 마주쳤을 때 심장이 무의식적으로 두근거릴 정도로 매력적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게 바로 연애감정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란 걸 규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전 성민씨가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말했잖아요.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냥 만나주기만 해도 돼요. 안 돼요?”
“…아….”
글쎄, 뭘까?
사람을 노련하게 다룬다 생각했다. 그래서 경계했다. 자신은 려욱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역시, 매력적인 사람이다. 이렇게 천하게 자신을 원하는 말을 하지만, 왠지 싫지 않다. 그건 성민 특유의 매력이 원인일까, 아니면 자신도 려욱을 스친 별볼일 없는 남자들과 똑같기 때문일까. 혁재는 규현에게 성민이 어떤 식으로 남자를 유혹했는지 말해주는 게 좋았을 것이다. 노련하지 않은 당돌함에 규현은 잠시 흔들릴 뻔 했으니까.
규현은 성민의 마음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규현은 점점 성민에게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면, 만나는 것…만입니다.”
“그럼요…. 그 이상은 원하지도 않을 거에요….”
점차 규현은 술 기운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해졌다.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이 성민임에도 이젠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다. 규현이 소파 옆으로 곯아떨어지자 성민은 마시던 술을 내려놓았다.
이젠 질릴 정도다.
김려욱을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던 인간들은 어째서 이렇게도 하나같이 바보 같은 것들뿐인지. 네가 이 꼴을 봐야 했다.
“정말이지 역겹군….”
그 단어 외에 어떤 말로 더 설명할 수 있나.
#7-2.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던 성민과 려욱의 사이는 전 같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둘 다 어서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뜨고 싶은지 묵묵히 먹고 있었다. 먼저 다 먹은 성민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려욱이 성민을 불러 세웠다.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놓고 물까지 튼 성민이 려욱의 앞자리로 돌아왔다.
“규현이는… 손대지 마.”
“-…뭐?”
“규현이는 건드리지 말라구.”
성민은 잠시 려욱을 바라보더니 말뜻을 알아챘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성민은 속으로부터 울컥함을 느꼈다. 이전 자신의 가벼운 속임수에 넘어갔던 남자에 관해 김려욱이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그렇게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가져야지.”
“…안 돼…. 제발, 규현이는….”
“몰라? 내가 원한 건 장난감들이 아니야.”
네가 진심을 준 인간을 내가 철저하게 짓밟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그러나 그 목적에 규현이 협조함으로써 성민 스스로 원하는 것이 가까워졌음에도 성민은 화가 났다. 괴로워하는 려욱을 보는 것이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인데, 그런 것인데 왜 그깟
“형, 제발-윽!”
려욱이 점차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한번 성민에게 부탁할 셈으로 쳐다보자 성민이 갑자기 멱살을 잡아 당겼다. 그 바람에 성민이 자신을 때릴 것이라 여긴 려욱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으로 성민이 이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맞아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당황한 것은 성민의 혀가 자신의 입 안을 헤집는 것이었다. 멱살이 잡힌 데 프렌치 키스라 려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껏 많은 남자와 사귀었지만 진심은 없었고, 스킨십도 최대한 자제한 편이었다. 때문에 성민의 거침없는 태도에 려욱은 가까스로 성민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되려 성민이 남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당겨와 그저 성민의 어깨를 잡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강도를 점차 높여 딥키스로 이어지자 려욱은 점차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코로 숨은 쉴 수 있었지만 머리에 열이 차 올랐다. 왜인지 심장이 어질하게 머리를 울려와서 아무리 코로 숨을 쉬어도 숨이 모자랐다. 잠시 성민이 떨어지고 려욱이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벽에 밀쳐져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으려는 것을 성민이 가랑이 사이로 다리를 넣어 버텼다. 졸지에 성민의 품에 안긴 듯한 자세로 늘어진 려욱의 티셔츠 안으로 성민이 손을 집어넣어 벗기려 했다.
“형, 잠, 깐만!!! 잠깐만!!!!!!”
“……하-….”
려욱의 날카로운 소리에 성민이 흥분에서 돌아온 건지 앞에선 려욱을 보았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는 려욱의 티셔츠는 거의 벗겨질 듯 위로 올라온 상태였고 그것을 벗기려는 손은 자신의 손이었다.
성민이 떨어지자 려욱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격렬한 키스 탓에 기침을 하며 숨을 고르는 려욱의 등은 왜소했다. 성민은 순간 규현을 내버려두라는 말을 하려는 려욱에 대한 짜증이 극에 달했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왜 자신이 려욱을 몰아부친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성민은 려욱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와 달리 성민은 뒤엉킨 머리 속의 어느 조각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7-3.
서류 때문에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후 돌아오자 사무실엔 학생이 아닌 익숙한, 그러나 잊고 싶은 사람이 서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 그냥…. 건너건너 연락했어. 그때-“
“앉을래? 마실 거 내줄게.”
“아니. 그냥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 온 거였어.”
미니 냉장고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든 성민이 시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굳어버린 표정을 숨기지 않은 성민의 얼굴에 시원은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긁다 입을 열었다.
“그때 유혹한 건, 내가 아니라 려욱이었어.”
#0-6.
시원은 려욱의 허리를 잡고 잠시 난감해졌다. 고백을 거절하자 울먹거리던 려욱이 뛰어가려다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걸 잡아주었다. 다시 자신을 올려다본 려욱이 똑바로 서서 시원에게서 멀어진 후 눈물을 닦아냈다. 시원으로서는 미안한 기분이 많이 들었지만 하필 성민의 동생이라니, 나빠도 많이 나쁘다.
“정말… 정말 안 돼요?”
자신을 보며 말하던 려욱의 눈에서 또 눈물이 떨어졌다. 계단에서 떨어질 뻔한 걸 잡을 때 시원 또한 긴장한 터였더라 심장이 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려욱의 젖은 눈에서 고였던 눈물이 떨어지자 시원은 심장이 이젠 아파져 옴을 느꼈다. 이 작은 아이를 울린 것이 자신의 형에 대한 죄책감, 그럼에도 자신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자 시원은 마음 속에서 나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막말로 자신이 려욱을 유혹한 것도 아닌데 반한 것을 성민이 어쩌겠는가. 게다가 이 아이는 성민이 그토록 끔찍이 아끼는 동생이다. 어쩌면 판단력이 어린 아이니까 자신이 조금만 응해주면 진심을 깨닫고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마 성민도 이해할 것이다. 철없는 동생이 잠시 실수한 거라고. 자신의 잘못은, 최소한 아니다.
시원은 려욱의 손을 잡아 자신에게 끌었다. 그 선택이 오랜 후에 어떤 뒤틀림을 가져올지 그는 아무 자각이 없었다.
#8-1.
손님이 드문 카페에 밀대를 들고 돌아다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규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제 사귀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자신은 마냥 신나기만 하는데, 려욱은 아닌 모양이다. 바뀐 게 없다. 자신이 먼저 넘어간 게 죄지, 싶어 체념하다가도 그래도 좀 표현해주면 안 되나 싶어서 발끈하게 된다.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구요.’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려욱의 사촌 형이니까, 려욱이 난처해지는 게 보기 싫었을 뿐이다. 게다가 전부터 계속 집적대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일침을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는데, 만났을 때 성민이 너무 맑다고 해야 하나. 나서기 전에는 려욱을 집으로 데려다 줬을 때 자신을 노려봤던 기억 때문에 잠시 의심이 가기도 했다. 이 사람, 다른 생각이 있으면서 자신한테 거짓으로 접근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너무 직설적인 그 표현에, 그 눈을 보는 순간 스스로 보고 있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뭘 그렇게 이중삼중 겹겹으로 보려고 하는가 싶어, 우스워졌다. 그러나… 왜 단호하게 잘라내지 못 했을까. 이래서야 결국 길거리에 채이는 남자들과 다를 게 없다. 자신은 성민을 핑계로 갈등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 처음에는 재수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매력적인 사람이고.
“-……놔!!!!”
“시끄러워!!”
“갑자기 와서 왜 이러는 거야?! 말이라도 해야 따라갈 거 아냐!!”
“일단 나가. 나가서 얘기해!! ……조규현.”
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에 카운터 쪽으로 나가니 려욱이 성민에게 팔이 잡혀 문 쪽에 서 있다. 성민과 눈이 마주친 규현은 굳어버린 듯 더 움직이지 못했다. 이 남자가 바로 며칠 전 자신을 불러내 애원했던 남자인가 싶어서. 그 눈에 어디에도 규현을 향한 연정 따위는 없다. 규현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틀린 게 아니었다. 분명 성민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규현을 향한 게 아니다.
“돌아올 때까지 카페 보고 있어.”
“-에, 예?!”
려욱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정신이 들 무렵 이미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선 후였다. 규현과 마주친 순간 뿌리치려던 려욱의 팔은 그대로 성민에게 잡혀 나가버렸다.
지금 보내면 안 돼.
그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갔지만 보이는 것은 이미 멀리 사라져가는 성민의 차였다. 인파에 밀려 쫓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속하게 이런 때에 한 번 걸리지도 않는 신호 때문에 규현은 이를 갈며 분해할 수 밖에 없었다.
#8-2.
“무슨 짓이야.”
“…내가 할 말이야.”
“장난해?! 형이랑 말장난 하기 싫어. 빨리 왜 끌고 왔는지나 말해.”
“-
“………….”
말은 않지만 려욱이 심히 당황하고 있단 것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차 안에는 에어컨에서 여전히 냉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흥분했던 게 거짓말처럼 소름이 돋았다. 냉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잠겨 있다.
“문 열어!!!”
“할 말 없어?”
“-갈 거야. 문 열어. 문 열라고!!”
발악하듯 소리지르는 려욱의 좌석이 뒤로 넘어간 것도 순식간이었다. 자신의 위에 올라타 내려다보는 성민을 노려보던 려욱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애초에 좁은 차 안에서 불가능했다. 려욱의 어깨를 누른 성민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저항은 하지 않았지만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몸은 성민이 원하는 답을 쉽게 내주진 않을 듯했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
성민의 차분한 목소리가 려욱의 목덜미에서 흩어졌다. 려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언젠가
하지만 성민이 듣지 않고 자신을 외면하길 바랐다. 자신에게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랬구나- 하며 자신에게 등을 돌리길. 그래도 부모님 앞에선 언제까지나 좋은 형으로 남아줄 성민이니까. 자신을 봐주지 않아도 그런 식으로는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이유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한 때의 일은 정말 영영 잊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성민은 려욱이 모든 것을 파헤쳐서 직접 보여주길 원하고 있다. 낱낱이 까발리고 까발려서, 설명해주길 원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곳까지 차로 끌고 와서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리 없음을 려욱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놔주려 했으면 이미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좋아해서 그랬냐… 그래. 좋아했어. 형을 사랑하는
려욱은 성민을 밀어냈다. 다시 떨어진 몸 위로 성민이 있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눈에는 려욱의 말을 이해하지 못 했음이, 더 자세한 모든 것을 원하는 게 지나치게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려욱은 가슴이 아팠다. 입술을 깨물었다.
“왜? 솔직하게 다 말해줄게. 뭐가 궁금해?
…이런 걸 바란 건, 정말로 아니었다.
멍해져 있는 성민을 밀쳐내고 문을 열기 위해 운전석 쪽으로 팔을 뻗었다. 잠금쇠를 풀고 나가려는데 성민이 려욱의 허리를 굳게 붙든다. 그 손을 떼내려 하던 려욱은 어쩌지도 못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 성민이 나쁜 게 아니다. 성민을 그렇게 만든 자신이 나쁘단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놔주려고- 규현을 붙들었다. 그런데… 업보란 것은, 결국 어떻게든 돌아 와서 자신을 삼킨다. 자신이 편해질 길 따위는 이미 시원을 자신에게 끌어들인 순간 모두 망가진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저 어떤 감정이든 성민을 붙잡고 싶었을 뿐이었던 어린 날의 자신은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미안해, 형…. 나는….”
“됐어…. 말… 안 해도 돼….”
성민은 려욱을 끌어 안아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해주지 못한 말을 해야 했지만 려욱이 너무 지쳐 성민은 그저 달래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9-1.
규현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렸지만 곧 극도의 실망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 혁재는 영문을 모르고 규현의 반응에 발끈해 려욱에게 따지려다 당황했다.
“려욱이 형, 잡혀갔어요.”
“무슨 일 있었어?”
“
규현의 짜증에 혁재는 흠칫했지만 이미 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기도 해서 억지로 규현을 추스르게 시켰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도통 받지 않는다. 아무래도 연락이 될 거 같지 않아서 걸던 통화를 끊고 키홀더를 뒤적거렸다. 겨우겨우 나온 규현을 끌고 나와 가게를 마무리한 후 문을 잠갔다.
“형은 려욱이 형이랑
“음……… 성민이 형이 워낙 도덕 쪽으론 투철하니까 설마 했지….”
“젠장! 뭐가 도덕이야! 언제는 내가 좋네 하면서 쫓아다녔으면서 오늘 어땠는지 알아요?! 남의 물건 건드린 인간 취급하면서 쳐다보잖아요!! 젠장!!!!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너도 생각보단 태평하구만.”
“아-오-!! 술 마시러 가요, 술! 술!! 진짜 닭 쫓던 개가 돼 버렸어! 젠-장!!”
술 못 마신다고 외치는 혁재의 외침을 묵살하고 규현은 혁재를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섰다. 그때 만약, 려욱이 성민을 몰아내길 바랐다면 자신은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려욱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카페를 봐달라고 말했다. 너무나 괴로운 표정으로. 그게 려욱이 전부터 말했던 짐과 관련된 일인 것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모르는 듯했지만, 려욱은 성민과 관련된 일에 있어선 표정이 다양해진다. 다들 표정이 없고 무뚝뚝하다지만, 성민과 통화를 할 때 진심 어린 표정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마 려욱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 표정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진짜…… 재수 오질나게 없지. 하필 그런 상대일 줄이야.”
#9-2.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다음날 출근한 려욱의 얼굴은 눈가가 퉁퉁 부어서 규현은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에 한숨이 났다. 이대로면 진짜 다리 이어주기 역할이나 한 셈이다. 게다가 성민도 놓치고 려욱도 놓치고…. 운도 드럽게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성민이나 낚을 걸 그랬나 싶었지만 포기했다. 려욱 때문에 아마 전 상대들도 깔려준 것일 게 뻔한데, 도중에 이렇게 파토났으면 분명히 자신을 깔았을 성민이다.
규현은 어느 정도 헤어질 것에 대해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려욱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민이 이쪽을 찾아오는 일도 없다. 문자나 전화를 하는 일도 본 적이 없다. 분명 성민이 자신의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건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것뿐이다. 왜냐면 규현은 아직 려욱이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려욱을 집까지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너무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성민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렇게 궁금하면 연락해보지 그래?”
라며 닦던 컵을 놓지도 않고 웃으면서 말하지 않는가. 규현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늘은 확실히 해둘 생각을 굳혔다. 굳이 집 앞까지 데리고 가서 할말이 있다며 놀이터로 끌고 와서, 그네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규현과 려욱을 본 한 연인이 결국 돌아갈 때까지 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 나랑 계속 사귈 거야?”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잖아. –답답해. 애초에 형이 날 좋아하지 않는단 건 알고 있었어. 그래도 몸부터라도 묶어놓으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하필 상대가
“…무슨 소리야? 나랑 성민이 형은 사촌이야.”
“자꾸 고집 피울래? 그럼, 지금 나한테 키스해 봐. 연인이니까 그 정도 못 할 건 없겠지.”
“…고집은 네가 피우잖아. 왜 그게 갑자기 또 키스로 이어져? 하고 싶음 하면 될 걸….”
“그래. 내 고집이야. 빨리 해 줘.”
규현을 황당하단 듯 보던 려욱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규현에게 눈을 감으라 했다. 려욱이 자주 쓰는 향수의 농도로 그가 다가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규현의 앞에서 짧게 머뭇거리는 듯한 숨결은 결국 규현에게 닿았다. 하지만 규현은 되려 우울해졌다. 이래서야 성민과 려욱을 저울질하던 의미가 없다. 생각보다 자신은 깊이 려욱을 좋아하고 있었다. 성민이라도 잡을 걸 했던 건 거짓이다. 이 사람이 좋다. 이 사람의 사랑이 자신이고 싶다.
“이제 안심이 돼?”
“…김려욱….”
이름을 부른다며 핀잔을 주려던 려욱은 규현이 자신의 얼굴을 붙잡아오는 것을 어쩌지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물기가 어린 괴로운 표정의 규현의 얼굴이 가까워짐을 느꼈을 때, 려욱은 눈을 감았다. 규현의 온 몸이 자신을 원하고 있음을 왜인지, 키스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열기에 잠시 겁을 먹었지만, 려욱은 곧 저항을 풀었다.
“나는, 너 안 놔…. 그러니까 네가 나를 놔야만 해.”
“내가 널 왜 놔…. 오늘 정말 이상해. 왜 그래?”
“이번 주말에 여행가자. 가줄 거지?”
“참…. 떼쟁이네. 알았어.”
규현을 겨우겨우 보낸 려욱은 열쇠로 아파트 문을 열며 한숨을 쉬었다. 거실 불을 켜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챙긴 후 샤워를 했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젖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규현의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 위에 손을 대어본다. 이제 더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성민과 규현을 겹쳐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규현이 아니라 성민이었으면, 자신에게 닿아오는 것이 규현이 아니라 성민이었으면. …그래서 규현이 자신을 절실하게 원해 오는 키스에 당황하고 만 것이다. 진심으로 부딪혀오면,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성민은 자신을 진심으로 원해올 일이 없으니까….
씻고 나온 거실에 울리는 벨소리에 허둥거리며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규현이다. 어쩐지 맥 빠지는 한숨을 짓고 전화를 받으니 밝은 목소리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씁쓸하다. 규현의 밝음이 좋다. 규현의 순수함이 좋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 이상을 받아들여 줄 수 없다. 그건 아마 규현을 괴롭게 만들 것이다. 웃는 관계, 좋은 관계보다 더 한 것을 원하는 상대에게 피상적인 감정들은 금세 정체를 드러내니까. 지금까지 스친 남자들이 진심을 원하는 순간 자신과의 관계는 부서진다. 굳이 성민이 뺏지 않더라도 늘 그랬다. 혁재는 한두 번은 이해를 못 하다가 알아차린 후부터 늘 훈계하며 자신을 걱정한다. 남에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란 유쾌한 것은 아니다.
그 고백 이후로 성민은 세미나 때문에 일본으로 출국한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돌아오면 어떤 표정으로 봐야 좋을지,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하지만 답은 이미 나 있다. 그저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자신의 표정이 생각대로 따라줄지에 관한 여부다.
아마 성민도 그 때문에 자신에게 연락을 하고 있지 않는 거겠지. 말랐다 생각한 눈물은 성민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 순간 막았던 것이 터져버린 듯 흘러 넘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황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게 아니라 막연히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가가 아리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게 아니다. 사랑이라면 이렇게 잔인할 리가 없다. 성민이 세상으로 연결점을 찾고자 선택한 시원을 배신하게끔 부추긴 자신의 마음이 사랑일 수 없다. 정말 사랑이라면, 모든 걸 놓고 행복해지길 바라야 하겠지.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성민이 돌아봐주길 원한다. 돌아오길 바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주고 행복을 기원한단 것 따위, 불가능하다. 성민에게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게 불가능함이 이미 과거의 선택으로 증명됐으니까.
#9-3.
꽤 산뜻한 차림으로 집을 나선 려욱은 문 밖에 서 있던 규현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고대를 했으면 아침 차로 끊었는지. 자신도 기차를 타는 것은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 가는 일을 제외하곤 꽤 오랜만이긴 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언제 성민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오늘 돌아오면 어쩌나…. 물론 그렇대도 자신을 부를 성민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가볍게 말장난을 주고 받으며 기차역으로 나가 기차가 들어올 것을 기다렸다. 아침이라 약간은 싸늘한 공기를 가르고 역 안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나치게 맑은 날이다. 2주 가까이 보지 못한 성민이 새삼 생각나서, 규현이 권하는 오렌지 주스 팩에 빨대를 꽂아 마시면서도 마음 한 켠은 집중하지 못 했다.
그때 마주 본 너머의 플랫폼으로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가 정차하고 곧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통통 뛰어다니는 비둘기를 보고 있었다. 규현은 하늘을 보며 상쾌한 여름 아침 날씨를 만끽했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날이다.
그때 려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린 듯 앞을 바라보는 려욱을 보다가 무엇인가 싶어 앞을 바라본 규현도 표정을 굳혔다. 성민이 뒤 편의 움직이는 사람들 앞에 이질적으로 멈춰 서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지독한 우연이었다.
[……
그리고 규현은 눈을 감았다.
#10-1.
혁재가 역에 도착했을 때는 규현이 창구에서 직원과 싸우고 있을 때였다. 규현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환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미 사용한 표의 환불은 불가능하다고 직원은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규현은 울분을 토하듯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남는 거라곤 목소리빨과 성량뿐이었던 그라, 결국 통근기차를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직원은 기가 질려 완전한 환불은 아니었지만, 일부 환불은 인정했다.
그리고 규현은 그 돈으로 맥도널드로 들어와 맥모닝을 세 세트를 시켜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규현이 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고막이 아파 역으로 와 그런 꼴을 본 후라, 이런 화풀이성 식사에 혁재의 위가 좋을 리 없다. 더군다나 째째하게 그 돈으로 자신의 세트값만 치뤄서, 혁재가 먹고 있는 건 순전히 혁재의 돈이다. 다 먹은 쓰레기를 버리려는지 일어나는 규현을 보며 혁재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야, 나 덜 먹었어.”
“알아요. 더 시켜먹을 건데, 형도 더 먹으려면 먹어요.”
……더 먹는 거냐, 너…….
아침 댓바람부터 역으로 나온 꼬라지도 웃기지만 규현의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질리는 노릇이다. 어떻게 된 건지 묻고 싶지만 분위기로 봐선 일단 차였단 것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규현이 일주일 내내 자랑하고 다닐 때마다 장난스레 구박을 주던 려욱이 갑작스레 철회할 이유가 없다. 집에 급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은 이상에야…. 아니면 성민이 형이 나타났던지….
……설마?
#10-2.
려욱은 성민의 다소 바보스럽기까지 한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바람에 성민이 자신에게 달려오는 게 얼마나 주목거리가 됐던지. 그것도 모자라 그 계단들을 뛰고 뛰어 와선 규현에겐 말도 없이 자신을 데려왔다. 그 때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야하겠단 생각도 들지 않아서 일단 따라오긴 했지만, 규현이 얼마나 화가 나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데려온 사람은 자신을 꿔다 논 보릿자루 취급하며 집안 곳곳에 자신이 사온 것을 늘어놓았다. 이래서야 자신이 긴장한 게 헛수고다. 어깨에 힘을 빼고 소파에 몸을 기대니 긴장이 풀렸는지 피곤함이 밀려온다. 느끼지 못했지만 괴로움은 계속 자신을 잠식해서 피로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다만 정신이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형 때문에 규현이 화났겠다.”
“…왜?”
“왜긴…. 당연히 규현이는 나랑 여행 간다고 일주일 전부터 들떠 있었는데….”
“그래? 난 그게 고백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였나?”
“무슨…. 무슨 고백? 어쨌든 옛날 일이고, 난 이젠… 규현이하고-“
채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려욱은 다가온 성민을 보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터라 졸지에 성민의 팔 안에 갇힌 모양새에 려욱은 성민을 곧게 쳐다보지 못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굳이 그걸 자신의 손으로 잡아 돌린 성민은 그대로 려욱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끔 키스를 했다. 예전에, 성민이 화를 내서 비가 왔을 때 마중 나갔을 때 자신에게 한 키스와 비슷하다. 숨을 쉬어도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해져 온다. 자신을 압도하고 압도해서, 모든 걸 자신의 것으로 하고야 말 것 같은 키스에 려욱은 어쩔 도리 없이 밀어내려 했던 성민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 고백도 들어줘.”
“…응…?”
“이주일 동안, 생각했어. 내가 그 동안 네가 사귄 남자들을 꼬드긴 이유가 과연 미워서였을까. 네가
“……기대하게 만들지 마….”
“네가 바라는 대로야. 난 너밖에 안 보이는 미친 새끼야. 내가
려욱은 성민을 끌어당겼다. 려욱은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행복을 느꼈다. 너무나 먼 곳을 돌아서,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입혀가며, 놓지 못 했던 성민과 자신. 이제야 서로 만났다. 이제야 서로 진심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너무 행복하다 못해 가슴이 아플 정도로 벅찼다.
#11-1.
공항에 나온 려욱과 성민을 보는 규현과 혁재는 각자 다른 표정이었다. 혁재는 지나치리만큼 신이 나 있었고, 규현은 지나치리만큼 극도의 우울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규현과 결국 헤어진 려욱은, 가게를 처분하고 성민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로 했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규현은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머리 속에 든 것이 너무 엉켜 있었다. 결국 혁재가 옆에서 신나서 떠들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규현은 려욱이 성민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가려고 할 때 겨우 외칠 수 있었다.
“꼭, 꼭!!! 다시 돌아와!!! 꼭이야! 꼭!!”
알겠다는 듯 웃어 보이던 려욱이 결국 성민과 함께 사라지고 혁재는 규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누가 보면 둘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말해보고 싶었어요.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어린애 같긴. 가자! 형아가 햄버거 사줄게!”
“누가 누구보고 어린애 같단 거에요…. 인천까지 왔으면 비싼 것 좀 사라고요. 이제까지 내가 형네 가게서 사준 꽃값이 얼만데. 꼴랑 런치타임 햄버거로 떼우려고?”
속셈을 들킨 혁재가 그날 울상으로 햄버거 다섯 세트를 규현의 몫으로 사준 고도 세 세트를 포장으로 사 주었다. 그리고 규현은 후에 째째하게 햄버거 세트나 사주는 형으로 혁재를 오래오래 두고두고 놀려 먹었다.
#8-3.
“가족하고 통화하셨나 봐요, 교수님.”
“응…. 요즘 딸애가 시집을 가더니 부쩍 정이 많아졌어. 애를 낳아서 내 생각이 자주 난다고 해.”
“특히 모녀들끼리 그렇더군요.”
마침 통화를 끝낸 모양인지 정원으로 나온 성민을 보며 여인은 곱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여름 밤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도시라서 낮의 과열을 식히기 위해선지 유난히 싸늘한 날씨였다. 내미는 카디건을 받아 든 여인은 입으며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민이는 가족 관계가 부모님하고 남동생? 하나 랬던가?”
“네…. 남동생이 있죠. 하나뿐인. 그래서 어머니가 지나가는 여자애들만 보면 귀여워하시고 그래요.”
“이쁜 며느리 보면 곧 만족하시겠지.”
“교수님 따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농담도 잘해. 아무튼 내일 세미나 잘 해 보자구!”
“네. 안녕히 주무세요.”
이내 들어가는 교수를 보며 라운지에서 사온 커피를 마셨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했다. 우선
하지만 가장 반전은 려욱이 자신을 사랑하기에 그랬단 것이다. 상상도 못 했다. 그 행동들이 결국 자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 생각하면, 과연 려욱은 성공했다. 자신은 이제 누구에게 먼저 집착해서 이런 행동을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시원에겐 아무 감정도 못 느낀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자신은 시원을 봐도 아무 느낌도 없다.
내가 시원이를 통해 세상으로 나가려 했다고? –물론 시원과 함께 있으면 그날, 자신이 려욱을 챙기지 못한 데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전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되려 시원의 지나친 해맑음이 려욱의 위축된 태도와 비교가 돼서, 자신에게 별 도움도 되지 않는 남자였다.
오히려 성민 스스로, 성민의 눈에 려욱은 성민이 아닌 다른 인간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그 광경을 보고 느낀 분노는, 순전히 려욱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감정 그 뿐이었으니까. 다른 남자의 품에 있는 려욱 따위, 보고 싶지 않다. 그 아이에겐 자신 하나면 된다. 이제까지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못 했던 부분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이성의 덕일 것이다. 이복 동생이라도 한 가족이니. 노는 애들 사이에 끼어서도 가족들은 전혀 눈치 못 챌 정도로 보수적인 인간이었으니. 하지만 려욱의 고백에 간단히 산산이 부서진 도덕이란 얼마나 부질없는지. 성민은 싸늘한 바람이 내려앉음을 느끼며 커피가 몇 모금 남은 종이컵을 흔들었다.
사랑이라… 그딴 단어에는 흥미 없다. 최후에 사람에게 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련이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일 뿐. 사랑이란 알량한 장막으로 상대방을 포장한 것을 신뢰하고 애틋히 여긴다. 하지만 결국 그 막이 벗겨지는 순간 사랑은 깨지고 사람은 말한다.
“너를 정말 사랑했었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 뭐가 아니었지? 처음부터 한 사람 위에 뒤집어 씌운 자신의 환상을 품었던 주제에, 사랑이란 단어로 스스로를 포장하려 하는 것일 뿐. 인간이란 결국 자신이 볼 수 있는 세계 외에는 믿지 않는 나약한 생물이니까. 물론 자신 또한 그런 인간들 중 하나이고, 려욱의 사랑이란 감정도 그 인간의 감정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보다는, 역시 려욱을 가지는 게 더 좋겠지. 한 사람을 온전히 내 소유로 하는 것. 그것이 예전부터 바랐던 복수의 대상이라면, 더 좋은 답 같은 건 최소한 자신에게 없다.
–좋아, 김려욱. 나를 가져도 돼. 하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처음부터 끝까지 너이니 이젠 도망칠 수 없어.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오게 선택을 해온 건 나이지만 너는 거기까진 모르는 게 좋겠지. 죄책감에 시달리며 나만을 생각하도록 해. 그 동안은 난 네 것일 테니까.
성민은 호텔로 들어오며 남은 커피가 든 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컵은 잔여물을 튀기며 가벼운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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