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때문에 삭제했던 녀석들 정리 중입니다.
근데 제가 뭐뭐 삭제했는지 까먹었어요. ㅋㅋㅋㅋ
큰일입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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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메르헨
성민은 턱 끝까지 숨이 차 올랐다. 그건, 너무 뛰어서- 몸이 힘들어 그런 게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차갑고 냉철했지만, 동시에 너무 무겁고 뜨거워서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무게의 감정 때문이다. 우습게도, 몸은 물리적 외압뿐만 아니라 정신적 외압에도 좌지우지 돼버린다. 어쩌면, 물리적인 외압보다 더 괴로운 것은 정신적인 압박일지- 알 수 없다.
택시는 번화가를 빠져 나오자 거침없이 질주했다. 택시기사에게 아파트로 가는 길을 말하는 성민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그저 앞만 보며 가는 길을 말하는 성민과 택시기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탓인지, 기사는 오래 지나지 않아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주말의 이른 오후에 어울리는 일상의 이야기들과 즐거움이 흘러나왔다.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하는 디제이들과 재미난 사연에 기사는 못 참겠는지 몇 번 픽픽 웃기도 했지만 성민은 팔짱을 끼고 그저 앞만 볼 뿐이었다. 한숨조차도 쉬지 않는 성민의 미간은 찌푸려지진 않았지만, 약간 구겨져 있었다.
충격으로 인한 흥분에 숨이 차오른 것도 잠시였고, 지금은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그런 질문은 너무 빤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왜 내가
그러나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했지? 너는 그 어긋난 아베마리아를 치면서, 나를 속으로 비웃고 있었나? 너 밖에 모르는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너 하나만을 위한 나였기에, 네가 무슨 행동을 해도 이해해 줄 거라 여겼나?
려욱은 결국, 자신을 남보다 더 매몰차게 대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성민의 삶을 찾길 바란다며, 자신이 짐이 되고 있단 그 죄책감으로- 성민에게서 등을 돌린 건, 바로 김려욱이다.
알지 못 했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은 결박 당한 마음의 위에 물에 적신 천처럼 갑작스레 내려 앉는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고통스러워 할수록, 숨은 잡아 먹혀간다.
성민은 택시기사에 양해를 구해 그와 함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려욱은 로프에 묶여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남자는 통화를 끝내더니 려욱 쪽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씨익 짓는 웃음에서 려욱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뺨을 날리는 손길에 고개가 돌려졌다. 부어 오른 뺨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려욱은 그럴수록 이를 악물며 입에 물린 헝겊 때문에 말하지 못 하는 것에 항의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너는 정말 클수록 네 어미와 닮아가는군.”
“…….”
“그 눈! 정말이지 역겨워! 널 죽이면 네 눈부터 먼저 파낼 테다!!! 항상 그런 눈으로 날 노려봤지!! 내가 빌 때도!!!! 부잣집 년들이란 어쩔 수가 없어!!!!! 내가 좋아서 결혼해놓고 어떻게 나를 그렇게 벌레 취급할 수가 있느냔 말이야!!!!!”
남자의 주먹이 려욱의 뺨을 날렸다. 의자가 아래로 쓰러지며 려욱의 몸도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입에 물린 재갈 사이로 피가 흘러 내렸다. 남자는 숨을 고르더니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처럼 커지던 웃음소리의 끝에 남자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려욱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조금 벌려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빛이 흐릿했다. 찬물을 가져와 려욱의 위에 부은 남자는 려욱이 눈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나는 네 놈 새끼가 살아있는 게 너무 싫어. 알아? 그 년이 널 내 아들이라고 낳았다 생각만 하면 꼭지가 돈단 말이야!!!!!!!!!! 거짓말을 했어! 니가 내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했지!!! 너는 그 새끼의 아들인데 말야! 날 속이고 거짓말을 했어! 내가 가난하니까 속여도 좋다고 생각한 거야!!!!”
“……”
“거짓말?! 사실이야!! 봐! 지금 누가 살아있는지! 그 연놈들이 거짓말한 대가는 죽은 거다!! 그 연놈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죽은 거라고!! 나는! 나는 속았기 때문에 살았어! 하지만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지!!! 나는 그 덕에 인간 쓰레기가 됐는데 너는 왜 멀쩡히 살아있느냔 말이야!!!!!!!!!”
남자는 이미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려욱의 반응과 관계없이, 그는 혼자서 문답을 하며 미친 듯이 웃어 제겼다. 려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아픈 것보다도, 이런 상태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상할 수가 없다. 그게 혹여 남아있을 성민에게 피해가 가는 형태로 드러나게 되면, 견딜 수 없다. 려욱은 뒤로 묶인 매듭 사이로 손을 시험 삼아 빼내는 동작을 해봤다. 묶어본 적이 없는지 생각보다 꽉 묶이지 않은 로프는 쉽게 손을 빼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의 발길질이 려욱의 배로 향했고 려욱은 피비린내 섞인 기침을 하며 괴로워해야 했다.
“주인공이 오신다는 구나. 아들아.”
“……!!!!!”
“하하하하- 정말 멋진 연극이야- 그렇지, 아들아?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 제물로 썼던 주인공이 손수 오신단다- 마중을 나가자꾸나!!”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남자의 손에 일으켜진 몸을 뒤로 내뺐다. 남자는 귀찮은 듯 욕설을 짧게 뱉더니 려욱의 배를 다시 가격했다. 려욱의 몸은 죽은 생선처럼 늘어졌고 남자는 그를 데리고 문 밖을 나섰다.
“멋진 타이밍이야,
“……뭐 하는 짓이야.”
“오, 이런이런-. 왕자님이 화나셨군. 하지만 공주님은 지금 이렇게!”
“으헉-!”
“내 손 안에 있지.”
려욱을 들쳐 멘 남자가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 끝 쪽에서 걸어오던 성민은 미처 상황을 판단할 새도 없이 말려들었다. 주도권이 완전히 남자에게 잡힌 상태에서, 남자는 짓궂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려욱의 상체를 허공으로 넘겼다. 아파트 난간에 등이 걸린 려욱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그런 남자의 행동에 놀란 건 성민과 함께 온 택시 기사로,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놀란 상태로 멍하니 덜덜 떨고 있었다. 성민은 그런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표정- 언뜻 보면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뚱하니 려욱의 아버지를 보고 있는 성민은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원하는 게 뭐야?”
“아하! 그렇게 나오셔야지.”
“……네 놈 패턴에는 이미 질릴 만큼 당했어. 이번에도 돈인가?”
“날 잘 아는군. 하지만 이번엔 틀렸는데. 내가 원하는 건…”
그때 려욱의 눈에 희미하게 빛이 돌아왔다. 구름이 끼여 회색 빛에 묵직한 하늘을 보던 려욱은 앞 쪽에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걸 보았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다. 이 남자가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을 해하리라 이미 예측했었다. 다만 폭발할 타이밍의 차이일 뿐. 자신에겐 더 이상, 기대할 어떤 구석도 없단 판단을 내렸다. 려욱은 다시 눈을 감으려다 성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김려욱은 안 돼. 너는 그 아이가 단순히 거짓말의 증거겠지. 하지만 내겐 내 숨이야. 김려욱은 내 목숨이고, 내 전부야.”
“하하… 어이없군. 피아노도 못 치게 된 병신 새끼가 니 놈 목숨이라고?”
“그래. 어떤 김려욱이건, 상관없어. 저건 내 김려욱이야. 그러니까 넌 꺼져.”
“…말은 잘 하시는군. 하긴, 사실 난 네 놈 새끼도 너무 싫었어. 항상 날 벌레 보듯 하는 게 아주 재수 없었거든. 까놓고 말해 나보다 더러운 건 너지. 자기 부모를 죽인 남자한테 입양돼선 그 새끼의 자식을 사랑하다니.”
려욱은 성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 들은 이야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허공에 몸이 있는 것보다도, 지금 자신의 아버지란 작자가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성민이 형 부모님을? 그러니까 내가 알던 성민이 형의 아버지는 사실 성민이 형의 아버지가 아닌 거야? 그 사람이… 성민이 형의 부모님을 죽였다고? 무슨 이야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잖아!!
남자는 려욱 쪽을 내려다보았다. 려욱의 눈에서 눈물이 차 허공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려욱의 몸을 잡아당겨 려욱의 입에 묶었던 로프를 끊었다. 벌벌 떨고 있는 려욱의 목에 칼이 향했다. 그러나 려욱은 소리를 지를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무의식 중에 몸이 앞으로 향해 칼이 목에 닿아 피가 칼끝을 따라 흘렀다.
“형, 형….”
“가만 있지 못 해!!!”
“형… 흐……
이를 악물고 성민의 이름을 부른 려욱은 후들거리던 다리를 겨우 일으켜 세웠다. 뒤로 묶인 팔을 풀어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자신을 막고 있던 남자가 거슬릴 뿐이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없다. 자신이 들은 말이 진실인지, 그저 성민이 확인시켜주길 바란다. 자신은 정말 성민에게 있어 짐일 뿐이었는지, 그런 운명을 지워줄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 찔리지도 않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예상치 못한 힘에 놀란 탓인지, 남자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이제 두 팔마저 자유로워진 려욱은 남자는 보이지도 않는지 성민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려욱은 마치 비에 젖은 나비가 처량하게 쉴 곳을 향해 부서질 듯 날아드는 듯해서, 성민은 마치 곧 줄이 끊어지기 전의 인형극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남자가 려욱의 등을 향해 칼을 꽂기 위해 달려들 때, 성민은 더 볼 것도 없이 려욱을 자신의 품 안으로 감싸듯 잡아 돌렸다.
“하……하하……하…….”
“아… 아……아….”
남자는 성민의 등에 꽂힌 칼을 보고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려욱은 자신의 위에서 자신을 품에 안은 성민을 겨우 지탱하며 멍하니 있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자신의 앞에서 남자가 몸을 구부리며 낄낄 웃는 모습과 겹쳐, 자신의 품에 축 늘어진 성민의 몸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도 없다.
그 후에 택시기사가 경찰에 전화를 하고, 응급차로 성민이 실려가고, 남자가 수갑에 채워져 잡혀갔다. 규현은 경찰서에 도착해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려욱을 겨우 발견하고 안도하며 뛰어갔다. 어깨를 잡는 규현의 손에도 반응이 없던 려욱은 규현이 옆자리에 앉아 그를 몇 번 부른 후에야 규현을 돌아본다. 공포로 질린 표정이 겨우 일그러지며 울음을 터뜨리며 규현에게 매달렸을 때, 규현은 려욱의 등을 쓸며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려욱을 달랬다.
“어떡해… 죽으면 어떡해…. 나… 내가… 내 잘못이야…!!!! 나 같은 게 태어나서….”
“려욱아, 진정해. 네 잘못이 아냐. 그냥… 그냥 그 사람이 미쳐서 그런 거야….”
규현은 려욱을 일으키며 성민을 보러 가자 제안했고, 려욱도 겨우 눈물을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구치장에 갇혀 있던 그 남자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철창에 매달린 것은.
“나한테 그랬어!!! 나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날 속인 그 연놈들의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모든 걸 뺏으라 그랬어!! …그래, 그래… 그래서 내가 죽였지. 오늘이 그 날이랬어. 서두르지 않으면-!!!!!!!”
어느새 출입문까지 나간 려욱이 뒤를 돌아보려는데 규현이 려욱의 귀를 막으며 등을 밀었다.
“신경 쓰지마. 미쳐서 하는 소리야. 성민이 형이 기다리겠어.”
“…응…….”
막은 귀 옆에서 낮지만 정확한 발음의 규현의 목소리에 려욱은 울은 탓에 머리가 울림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 유리문은 몇 번 반동을 일으켰지만 이내 굳게 닫혔다.
“서두르지 않으면 유학을 간댔어!!!!! 그러면
들어줄 사람이 없는 외침은 유리문 밖을 나가지도 못한 채 경찰서 안을 허무하게 울렸다.
**
성민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뿌옇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성민은 그저 편안히 누워있었다. 아,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성민은 그렇게 바랐다. 몸이 너무 노곤했다. 그 노곤한 몸에 찾아온 오랜만의 휴식이라 생각했다. 이대로 잠들면, 정말 좋겠어.
‘성민아.’
‘오랜만이구나.’
이 목소리는… 부모님이다. 성민을 낳아준, 열살 때 돌아가신 부모님. 성민은 눈을 뜨려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성민의 이마에 손길이 닿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너무도 다정한 부모님의 손길에 눈물이 흘렀다. 이제 오래되어 다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어쩔 수도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힘들었구나.’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요. 왜, 왜 제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요? 아니면, 저와 그 아이는 갈 길이 다른 건가요? 왜 저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된 걸까요?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제가 평범하게 자라서 그 아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요?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힘들어요….
‘미안하다.’
그 목소리에 성민은 눈을 떴다. 아파트 복도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목소리를 찾아도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를 입양하고 려욱보다 자신을 아꼈던, 자신을 가슴으로 기른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너를 힘들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용서할 수 있으세요? 제가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제 가슴을 차라리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무너뜨려서, 무너져 내려서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싶었던 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두 분께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면서도, 저 역시 그 아이를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합니다.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셨는데, 그 의미를 배반할 수 없음에도- 그럼에도 제 마음 구석에 자리 잡은 그 여린 아이가, 이젠 제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저를 용서할 수 있으세요? 차라리 신을 모르길 바랐던 저의 파렴치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세요? 저조차도 용서할 수 없는 저를, 용서할 수 있으세요?
성민은 복도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복도는 끝없이 직선으로 계속 되었다. 성민은 자신의 힘으로 마련한 려욱과의 자리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힘차게 뛰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되려 더욱 멀어지기 시작하는 거리에 성민은 필사적으로 놓치지 않기 위해 뛰었다. 그러다 성민은 달리기를 멈췄다. 숨조차 차지 않는다.
아아, 이건가. 내게 내려진 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돌아갈 수 없어. 제자리가 없어. 자신에겐 제자리가 없다. 그런데 려욱과 자신의 자리라, 이 무슨- 웃기는 얘기인지.
이제는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모든 풍경이 회색 빛으로 물들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페이드아웃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듯 성민은 그 자리에 동상처럼 서 있었다.
‘너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잖니.’
…하지만… 아버지. 할 수 없어요. 저라도 제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저를 벌 줄 사람이 없잖아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떠나버리셨는데. 이런 역겨운 저를 용서해 줄 분들이 제 곁에 없잖아요. 그렇죠? 파랑새가 갖고 싶어서 파랑새의 날개를 꺾으려 했던 저를, 용서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
성민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파랑새? 그 아이? 누구지, 너는? 내가 사랑했어? 누구를? 나는 누구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던 거지? 누구야?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돌아와, 형… 제발…….’
왜? 왜 나에게 돌아오라는 거지? 그렇게 금방이라도 울듯한 목소리는… 괴로워. 왜 네 목소리가 날 이렇게 괴롭게 하는 거지? 어째서….
성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고집스럽게 앞을 보던 아이의 어깨가 금새 떨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는 아이의 어깨에 홀린 듯 몸을 낮췄다. 아이와 눈동자를 맞춰 그 눈동자의 눈물을 닦았다. 그래, 생각났다. 자신은 이 아이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상실감에 무너지지 않길 바랐다. 무너지던 자신을 잡아 지탱해준, 자신을 입양해 준 아버지처럼- 자신이 이 아이에게 그 빚을 갚아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약속했던 것이다. 지켜주겠단 약속은 사실, 그 동안은 네가 내 곁에 있어야만 하단 전제가 붙었었다. 그러면 나는 네게 내가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어떻게든 네 꿈을 이뤄주고 싶었다.
있잖아, 사실은. 알고 있었어.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너보다 십 년 가까이 더 산 내가 모르겠니. 하지만 네가 곧 맘에 드는 다른 곳으로 날아갈 것이라 생각해서 방해하고 않으려 했던 거야. 네 꿈을 이뤄야 내 빚을 갚을 수 있는데, 너를 내 곁에 묶어두면 안 되잖아.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나쁜 남자라서. 네가 여자친구와 가로등 아래서 키스하는 걸 우연히 본 후로 왠지 이상했어. 내가 아는 너는 항상 어린 너였기 때문에. 네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거란 걸 난 잊고 있었던 거야. 너는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된 거야. 네가 있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의식조차 못하기 시작할 때부터. 내가 너를 지원하는 게 당연해진 그 순간부터. 그리고 나는 욕심이 생겼지. 앞으로도 네가 내 곁에 있길 바라기 시작한 거야…. 아주 먼 미래까지도-. 가족이란 틀 안 이면 자연스럽게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수 있다 생각했지만… 네가 내게 고백했을 때, 결국 난 인정해야만 했지. 내가 원한 건 가족이 아니라, 연인이었음을… 그러기를 바랐음을.
그랬기에- 나를 좋아하는 네가 내가 아닌 인간에게 진로를 결정할 정도의 중대사를 먼저 알려준 게 싫었어. 나는 네 가족으로 남아있기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미 지워버린 때였기 때문에 더욱. 만약 네가 이런 나를 용서해도,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 나 혼자 져야 할 짐에 너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 미안해.
성민은 눈을 감았다.
---------------------------------------------절취선------------------
#16. 메르헨
성민은 몇 번의 수술을 거치고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다. 의사의 말로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한데,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중환자실로 가는 성민을 보며 려욱은 몇 번이고 실신을 반복하다가, 닿을 수 없는 성민을 비추는 유리창만 울며 바라보길 반복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성민은 중태였다. 동사무소 측의 일은 동희가 절차를 밟아주긴 했지만, 과연 몇 달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로 인한 려욱의 패닉은 도저히 수습될 수 없는 정도라, 며칠째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 드는 때라곤, 하루 중 성민을 면회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마저도 병실에서 우는 일만 반복해서, 결국 일주일이 지나자 려욱은 링거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성민이 쓰는 그 병원에서. 규현은 려욱이 또 먹지 않고 남겨놓은 환자용 식판을 보고 한숨을 쉬며 의자를 가져 와 앉았다.
“좀 먹어. 먹어야지 성민이 형 나으면 간호하지. 성민이 형 일반 병실로 옮기면 어쩌려고 그래.”
“……하….”
“먹어, 좀. 부탁이야.”
규현의 무미건조한 음성에 려욱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억지로 성민을 생각하며 죽을 입에 넣어보지만 정말 아무 맛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민은 생사를 오가고 있다. 오늘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이 오는 게 이렇게 끔찍할 순간이 올 거란 생각을 해본 적 없다. 눈을 깜빡 감고, 뜨며 늘 불안에 시달린다. 금방이라도, 성민이 혹여나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오늘은 자신과 같은 병원에 살아있는데, 내일은 싸늘한 시신이 될까 봐. 모든 건 자신의 탓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 그랬으면 만날 일도 없고 모두가 불행해질 일도 없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좋아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가 줘… 제발…….”
겨우 규현을 향해서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규현과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칠 못 하다. 지금 성민은 혼자서 사투하는데, 자신은 규현에게 위로를 받는 게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흐르지도 않는 눈물임에도 눈꺼풀이 또 뻑뻑해진다. 규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왔다. 그대로 복도를 걸으며 자신의 발소리를 들었다. 구석에 병실이 있다 보니 빠져 나오는 사람은 드물고 걸어오는 사람은 간간이 있다. 구두를 신은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울리는 자신의 몸무게를 실은 발자국 소리.
규현은 성민을 처음 봤던 때를 생각했다.
이제는 낡아빠진 10년 전의 기억 속으로.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설정 아시는지? 주인공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 이야기보다는 덜하지만, 만만찮게 진부하기 짝이 없는 관계였다- 자신과 성민은. 아니, 자신과 려욱이라고 칭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직접적인 관계로 따지자면. 한마디로 려욱과 성민의 부모님들은 그 둘만 죽지 않았다. 커브길을 돌던 중, 누구의 부주의인지 정확히 따질 순 없지만. 아마 자신의 부모님들의 부주의가 컸을 것이다. 그 둘은 그때 서로의 연기에 질려 하던 참이었으니. 부모님의 사이가 비틀어진 이유는 알 수 없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이전까지의 기억은 사진을 볼 때 희미하게 기억날 뿐, 기억해내기가 힘들다.
자신은 이미 끼어들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 좌석 뒤 편의 장난감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를 옮겼던 차였다. 마침 커브길에서 어머니의 잔소리를 참다 못 한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고, 그 앞에 오던 차와 부딪히며 어머니가 즉사했고, 아버지는 몇 시간을 신음소리만 내다 기절해 버렸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접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내 뇌는 그 기억을 모두 지웠다. 너무 놀라 정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도착한 병원에서 성민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려욱을 보았다.
성민은 매우 침통한 표정이었고, 려욱은 고통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간격으로 장례식이 치러졌고, 자신은 할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은… 솔직히 말하자면, 느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기억을 할아버지가 최면으로 가둬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려욱을 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뭔가 잃어버린 게 있음을. 할아버지는 이미 노쇠해 혁재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알고 있는 여자의 간호를 받거나 파출부 아주머니에게서 간호를 받을 뿐이었다. 집 창고에서 자신의 어릴 적 앨범을 찾아냈을 때 그 감정은… 분노와 배신감이었다.
왜? 왜 너는 네 곁에서 널 지켜줄 사람이 있었던 거지? 왜, 그보다 더한 꼴을 봐야 했던 내게는, 아무도 없었지?
TV에서 천재라며 나온 려욱을 봤을 때, 그의 무뚝뚝하고 차가운 표정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인터뷰의 끝에, 려욱 스스로도 감추지 못한 그 밟아짐은 분명 성민을 향한 것이었다. 자신에겐 없던 존재. 자신은 가질 수 없었던 존재. 그걸, 려욱은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게’ 려욱을 선택했다.
물론 당시에는 려욱과 성민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지만, 서울로 와 려욱을 만나고 성민을 만나며 확고해졌다. 그 둘을,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켜주는 그 이상으로,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게 더 견딜 수 없는 화를 일으켰다.
아, 나는 정말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네가 미워 견딜 수가 없다.
참, 뻔한 이야기지만. 려욱의 아버지를-친아버지인지 잘 모르겠지만- 꾀어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다루기 쉬운 건, 돈에 미친 인간이란 짐승이다. 유인할 길에 한 장씩 돈을 놓아두면,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생각도 못하고 기어들어온다. 대역은 모두
걸음을 멈췄다. 성민은 호흡기에 의지한 채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간간이 움직이는 기계가 그의 심장 박동을 알렸지만, 안정된 것이라기 보단 정말 금새 끊어질 느낌이었다. 규현은 성민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호흡기에 매달려 불안정하게 호흡하던 그는 채 며칠도 채우지 못 하고 주검이 됐었다.
“있잖아, 형.”
성민을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죽어.”
규현의 무감각한 말이 복도를 잠시 울렸다.
**
성민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파리했던 안색도 창백으로 바뀌었고, 며칠 더 지나면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를 띌 듯했다. 심장 박동수도 미약한 느낌에서 안정된 궤도로 회복되어서, 정신은 잃은 성민이지만 그가 살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려욱도 회복 속도가 당겨졌다. 마치 려욱이 성민을 계속 불러서 돌아오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려욱은 성민의 손을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놓지 않았다. 침대 옆에서 엎드려 자는 일이 며칠이고 반복되었다.
“부탁할게, 잠시만!”
“걱정 마.”
부드럽게 눈웃음을 짓는 규현을 보며 려욱이 잽싸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화장실이 급하다며 규현이 오자마자 부탁을 했었다. 규현은 검고 기장이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재질이 도톰한 느낌을 주는 천이 아니었다면 저승사자로 오인해도 할 말이 없을 차림새였다. 규현은 머리의 눈을 털고 자리에 앉았다.
“살아버렸네, 형.”
너무나 조용하게 말했기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병실은 규현의 소리를 삼켜버렸다. 커튼 너머로 가족 단위의 병문안을 온 건지 6인실의 병실은 너무나 시끄러웠다. 규현은 커튼 너머로 아이의 울음소리며, 달래는 어머니의 소리,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의 소리 등을 들었다. 다시 성민을 내려 본 규현은 호흡기로 손을 뻗었다.
“뭐 하는 짓이야?”
“-… 글쎄.”
“잠깐, 나 좀 봐.”
“좋아.”
혁재였다.
**
“무슨 짓이야? 네가 성민이에게 그럴 자격 같은 거, 없어.”
“……뭘 안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착각인가?”
“-…알아. 너에 대해서도, 네 집도, 너와 려욱이, 성민이에 관해서도.”
“그 여자는 말이 너무 많아.”
어둑해진 병원의 공원은 스산했다. 가까스로 벤치 옆에 선 혁재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왼팔을 오른손으로 문질렀다. 규현은 가로등 불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서 혁재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혁재는 이미 벤치에 앉았다. 규현을 보지도 않는 혁재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네 원한은 터무니 없어. 두 사람에게 네가 뭘 할 수 있는 권한 따위…”
“닥쳐. 네가 뭘 알아? 그래, 넌 사실은 알겠지. 하지만 네가 내가 아닌 이상, 어떤 말도 변명일 뿐이지. 네가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 내 기분을 알아? 네가 뭔데!!!”
“규현아, 제발!!! 안 돼!!!! 그만 보내줘! 네 마음에서 그만 지워버려!!!”
“미쳤어?! 놔…… 놓으라고!!!!!”
순간적으로 혁재에게 붙들려 가로등의 불빛 안으로 들어갔던 규현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이가 없어 스스로도 당황했던 규현은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혁재는 자신의 힘에 밀려 땅이 넘어져 있었다. 규현은 그런 혁재를 내려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 섰다.
“누나를… 용서해 줘….”
“-…….”
“네 엄마, 우리 누나… 널 두고 먼저 간 거… 제발 용서해 줘……. 규현아….”
규현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와서 놀랍지도 않다. 다만 바람이, 너무 추웠다.
**
규현이 가장 싫었던 건, 살아야 했던 이유. 사람의 본능이 싫었다. 그 본능으로 아버지는 핸들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향으로 틀었으니까. 커브길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핸들을 과하게 돌렸고, 어머니는 상대편 차에 완전히 부딪혀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이 일그러졌었다. 가속도가 붙은 힘이란 게 얼마나 센지, 그 희미한 영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죽어버렸다. 자신만을 남겨두고.
그래,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정말이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안이었다. 아마도, 달동네에서 살았다고 친척들이 수군거렸던 게 생각 난다. 어머니에게 가족이 있는진 알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허락치 않았다. 만나러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가끔 어머니의 남동생이란 사람이, 편지를 보냈었다. 처음엔 사랑이었지만, 그런 사랑이란 것도 시간이 지나면 허물을 벗는다. 어머니는 가족을 늘 그리워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쌀에 시달렸다.
아마 사랑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감정이 있긴 했었는데, 잊어버렸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쉽게 핸들을 자신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쉽게 돌려버리지야 못 했겠지.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였나. 혁재에게 그렇게 쉽게 끌릴 수 있었던 건. 최면이란 쇠사슬로 묶어버린 기억을 무의식의 심해에 던졌음에도, 한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슨… 이제 와서 정말 무슨…….”
지워? 누굴? 내겐 이미 지울 사람도, 지울 시간도 없는데.
규현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웃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기에.
**
성민이 정신을 차렸다.
그 소식을 려욱의 전화로 듣게 되었을 때, 왜였지. 안도감이 들었다. 규현 스스로도 놀랐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선 어쨌든 몸이 머리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지, 전화를 끊고 나선 저도 모르게 얼굴에 흘렀던 눈물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죄책감을 느낄 만한 사람도 아니고, 느낄 수도 없다고 스스로를 부추겼지만. 하지만 결국 미워했던 만큼 마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성민을 보러 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당연했다. 어쨌든 자신이 죽이려 했던 사람이니까. 당사자가 알건 모르건, 그런 의도로 려욱의 아버지를 이용한 건 틀림 없는 일이다. 새삼스레 미안한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에 성민과 려욱을 피한지 한 달이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군요.”
“얘기 좀 할까? 추워서 말야.”
성민은 려욱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규현이 내온 커피를 마셨다. 독을 탄 것 아니냐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게 꽤 어색해서, 차분하게 아니라 했더니 멋쩍어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있던 둘 중, 먼저 말을 꺼낸 건 성민이었다.
“다시 려욱이를 찾아온 건, 우연이었어?”
“역시 기억해내셨군요.”
“그야 난, 그 때 열아홉이었으니까. 너무 잠깐 봤던 거라 잊어버렸었지만.”
“괜찮아요. 저도 전학 와서 려욱이 얼굴 보고 체계가 잡혔던 거니까.”
“…그렇군.”
그리고 또 침묵. 커피를 마시는 소리,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 다시 들어올리는 소리의 반복.
“나, 려욱이랑 사귀기로… 했다.”
“-그렇군요.”
반복되는 침묵.
“네겐…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됐어. 네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돌아오려는 생각 못 했을 거야.”
“전 진짜 형을 죽이려고 했는데요.”
“진심이었구나. …하긴, 그래서 돌아왔지만.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지?”
“자수할 생각은 없어요.”
“너답다.”
성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문까지 배웅을 나온 규현은 문고리를 잡고 복도로 걸어가는 성민을 보다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정말로, 려욱일 미워했었니?”
“…잘… 모르겠네요.”
규현은 돌아서는 성민의 등에 외쳤다.
“형 진짜!! 바보인 거 알아요??”
“이왕이면 남자답다고 해줘.”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정말이지 성민의 멘트는 너무 안 어울려서, 규현으로선 웃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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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메르헨 [完]
규현은 이미 너무나 초라하게 늙어버린 남자를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게 정신의 끈을 유지하고 있음이 가늘게 뜬 눈에서 겨우 알 수 있었다. 그 희미한 빛마저 사라지면 아마 이 울음소리로 가득 찬 방에는 폭풍우가 닥칠 것이다. 규현은 머리 속으로 자신에게 법적인 친척이 몇 명인지 떠올렸다. 아마 정확한 수는 장례식을 치르면 알게 될 것이다. 졸업식까지 겨우 한 주였다. 호적상으로 아버지이자 자신의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는 규현의 눈동자는 이미 꺼진 재 같은 무의미한 어둠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슬픈가? 안타까운가? 어느 감정도 아니다. 그저 마음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냉혈한이기에 그런 건지, 자신이 외부에 친 벽이 너무 두꺼워져 버렸는지, -아니면, 자신이 그를 원망하고 있었던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다 인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지. 규현은 머리가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짐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어머니랄지- 할아버지의 손 끝에 엎드려 실신할 마냥 울어댔다.
규현은 기묘함을 느꼈다. 분명히 돈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라 여겼는데, 정말 동반인으로 끝까지 함께하리라 믿었던 사람이 떠나는 마냥 울고 있다. 그의 손자이자 아들인 자신은 흉내 낼 수도 없는 행동이다. 남자의 입이 미미하게 떨렸다. 변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귀를 가져대자 정말 마지막으로 비틀어내는 힘인지 띄엄띄엄 소리가 들렸다.
“미…안…… 너… 내…아…들…….”
이미 예상한 내용의 말이다. 규현은 남자에게서 귀를 떨어뜨리며 눈을 맞췄다. 가시는 길이나마 편하란 마음에 웃었다. 쓴 미소가 얼굴에 채 걸리기도 전에, 희미한 눈동자의 빛은 채 휘어지지도 못 하고 꺼져버렸다. 의사가 코 밑에 손가락을 댄지 몇 초 후 남자는 고인이 되었다. 솜으로 온 몸의 구멍이 막혀지는 시신을 보며 규현은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려 뺨을 닦았다. 물기에 식은땀이라도 흘렸나 싶었지만 역시 눈물이었고, 규현은 참다 못한 소리를 터뜨리며 울 수 밖에 없었다.
**
장례식 밖 벤치에 앉아있던 규현은 갑자기 지는 그늘에 시선을 올렸다. 혁재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규현은 순순히 잔을 받았다. 갓 뽑아낸 건지 율무차는 아직 따뜻해서 먹을만 했다. 씹히는 가루를 무시하며 마시고 있는데 혁재가 옆에 앉는다.
“며칠 째 잠도 안 잔다며. 몸은 괜찮아?”
“하는 일도 없어. 그냥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이 너무 많아서 피곤할 뿐이지. …어떻게 왔지? 그 여자가 널 불렀나? 이제 딴 살림이라도 차려보재?”
“몰래 온 거야. 가야지.”
“…너, 내 삼촌이야?”
다 마신 컵을 벤치 옆 쓰레기 통에 던져 넣은 규현은 몸을 움츠렸다. 양지이긴 했지만 뒤뜰인 터라 그늘의 냉기가 바로 온 몸에 부딪혔다. 얼얼한 추위에 눈을 억지로 추스리던 규현은 몸을 웅크려 혁재의 무릎에 누웠다. 벤치의 길이가 긴 편이 아니라 몸을 말아도 무릎까지는 벤치 밖으로 붕 떠 있다. 규현은 눈을 감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보단 멀어. 난 누나의 육촌동생이었으니까.”
“흠… 그럼 근친 아니지?”
“설마 윤리를 따지는 거야? 너답지 않은데.”
“나 성민이 형 만났다.”
혁재는 조그맣게 웃던 웃음소리를 멈췄다. 혁재의 웃음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눈을 뜬 규현은 옆 모습임에도 아련히,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난 내가 누군지 몰랐어.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가 내 기억을 지워버렸으니까. 나는 정말 내가 늦둥인 줄 알았어. 그런 거 치곤 엄마가 엄마 같지 않았지만. TV에서 우연히 김려욱 얼굴을 봤을 때, 이상하게 만난 적이 있던 기분이 들었어. 나를 인식도 못 하는데, 나는 똑똑히 보고 있는 그 느낌… 김려욱의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내 머리 속에 비워진 공간을 느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김려욱은 부모님의 장례식을 축으로 삼아 연주했던 거야. 그러니 나는 그 연주를 듣고 김려욱의 궤도에 같이 휘말릴 수 밖에 없었던 거지.”
규현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목소리가 점점 잠겨 들고 있었다.
“김려욱을 만났을 때, 나는 전율했어. 응급실로 실려가던 기억이 확실히 돌아왔어. 나를 보지 못 한 사람을 나는 똑똑히 보고 있던 그 기억은 데자뷰도, 내 착각도 아니었어. 그때 할아버지는 병세였고, 나는 결국 찾아냈지. 내 과거를. 출입이 금지됐던 창고의 열쇠를 빼내는 건 꽤 시간이 걸렸어. 몇 주 동안은, 김려욱 얼굴만 봐도 구토가 났어. 그 얼굴과 어머니의 망가진 얼굴이 겹쳐지는 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의문이 들었지. 왜 나는 그런 일을 겪고도 나를 지켜줄 사람을 만나지 못 했는데, 왜 김려욱은 처음부터 만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풀려난 기억이 내 목을 졸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괴로운데, 왜 김려욱은. 그래… 알아. 터무니 없지. 그런데 어떡해? 그 얼굴만 보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 울분이 삭혀지질 않는데. 아무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데.”
“……”
“내가… 이기적이야?”
규현은 자조하듯 말을 뱉었다. 그럼에도 얼굴은 그저 평온할 뿐이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와 표정이 2월의 한낮처럼 아이러니했다. 규현은 혁재의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기에 감았던 눈을 뜨지 않았다. 혁재의 대답은 이미 규현의 얼굴 위에 떨어지는 물기로 충분했다.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 성민과 려욱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모르는 게 짜증나고 미웠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게 꼴 보기 싫을 정도로 얄미웠다. 그런 주제에 서로에게 부담이 될까 짐이 될까 노심초사하는 건 정말이지 더 싫었다. – 그랬는데, 그런 둘을 생각할수록 둘이 너무 바보 같아서. 변명이다. 죽지 않길 바랐다. 누구든.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누구라도. 김려욱, 너는 내가 성민이 형을 죽음까지 몰았던 장본인임을 알면 배신을 느끼겠지. 하지만 보여? 나는 또 내 곁에 있던 사람을 잃었어. 너는
만약 네게
**
성민은 자신의 오른팔을 베고 누워 잠든 려욱을 바라보았다. 침대는 둘이 자기가 좁았다. 서로 바깥쪽에서 자겠다고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거실에 전기 장판을 깔고 누웠다. 오늘 혁재에게서 규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알게 된 려욱은 계속 심란했다. 아직 규현이 둘을 몰아세운 장본인임을 모르는 려욱인지라, 가려는 것을 규현이 부르지 않은 것을 이유로 겨우 말렸다.
생각해보면 지갑에 돈이 모자라서 택시기사를 집 아까지 데려간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려욱을 재촉해서 자신을 같이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았으면, 의지로도 사는 것은 불가능했을 일이다. 정신을 잃었을 때 꾸었던 꿈이 단 몇 분 같았는데 깨어났을 때 3주가 흘렀음을 알고 놀랐다. 여전히 부모님들에게 죄송하다. 하지만 고속열차의 풍경처럼 과거로 스치듯 흐르는 기억 속에서 규현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10년이 흘렀던들, 어떻게 그 아이를 잊을 수 있었을까.
규현은 분명히 려욱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 외치는 듯한 그 눈동자를 가진 아이를 완전히 잊었었다. 그 아이가 바로 려욱의 곁에 있다. 자신은 그 아이에게 려욱을 부탁할 생각이었고. –머리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무의식 중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 주제에. 그렇다 해도 려욱이 죽을 뻔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말 그대로 몸 속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
“무슨 생각해?”
“네 생각.”
“…묻고 싶은 게 있어.”
“말해 봐.”
잘 거라 생각했던 려욱이 좀 더 성민의 품 안으로 들어온다. 성민은 오른손으로 려욱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따뜻하다.
“형 부모님… 이야기.”
“아-아. 그거…. 별 거 아냐. 음… 그러니까 날 낳아준 아버지랑 길러준 아버지가 친구라서 술을 같이 마시고 헤어졌는데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어떤 사람이… 각목으로. 원래 어머니는 몸이 안 좋으셨는데 그 일로 충격 받으시고 앓으시다 돌아가셨고. 아저씨는 그러실 필요 없었는데 나 거둬주신 거야.”
“그럼 나도 얘기 하나 해줄까? 그 자식 말야… 친아버지 맞아. 유전자검사까지 했어. 그래도 못 믿는 댔어. 믿기 싫은 거겠지. 나도 그래.”
성민은 말없이 려욱에게 몸을 틀어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초침소리, 하수관소리, 바람소리. 따뜻한 공기, 따뜻한 이불, 따뜻한 너. 한 순간이라도 이런 순간이 오리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우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가까이서 자신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무엇을 그렇게 감추고 숨기려 했을까. 그게 서로를 위한 것이라 끊임없이 자신을 토닥이며, 그럴수록 깊게 파고드는 상처에 계속해 울고 있었는데. 서로가 행복해지길 원해서 그랬지. 하지만 그게 서로를 더 힘들게 하고 있었는데도.
사람은 왜 그리도 솔직해지기 힘든지.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멀고 먼 시간을, 헤매고 헤매다 돌았는지, 그리며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그 수없이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며. 그저 곁에서 체온을 닿아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감사할 수 있는데.
“나 사랑해?”
“……넌?”
“지금 이 순간이 내 꿈일 뿐이래도 신께 감사할 정도로.”
“나는 그런 네 꿈이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길 바라.”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너이기에.
**
[“……3년 동안 우리를 품어온 교정을 오늘 떠납니다.”]
2년 동안, 강당의 2층에 앉아 바라보기만 했던 졸업식. 이제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어 앉아있다. 아이들 모두 한껏 빼 입고 꾸며 입고 온 터라, 교복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다. 어쩐지 마지막 입는 교복이 아쉬워서 입고 온 자신이 민망할 지경이다. 이제 오늘로서 완전히, 고등학생이 아니게 된다. 설레는 마음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성민에게 보답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입학했었다. 타인은 자신보단, 나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자신만이 힘든 삶을 산다는 오만한 생각은 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투정이 되려 부러웠었다. 그래서 그게 싫어서, 참 제 인생에 책임 지지 않고도 편하게 산다 생각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생각들이다. 사춘기 한 번 격한 마음가짐으로 보냈구나,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살지도 않은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논하는 데서부터 이미 오만과 아집은 부릴 수 있을 만큼 부려댔었는데.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한 자신의 피아노는 얼마나 부족했던가. 이제 다시 예전만큼 칠 수 없겠지만, 앞으로는 음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수 있겠지.
“연락을 정말 단 한 번도 안 하더라~?”
“누, 누나….”
“안 하긴 뭘 안 해. 전후사정은 다 말해줬잖아. 뺨까지 때려놓고.”
“진짜?! 민주 누나 그랬어요!? 형 얼마나 아팠었는데 왜 형 몸을 때려요! 차라리 날 때리지 그랬어요. 어떡해, 형. 괜찮아? 많이 안 아팠어?”
식을 강당에서 마치고 교실에서 졸업앨범을 받은 후 마지막 종례까지 했다. 이어진 각자의 포토타임에 친구들과, 성민과 사진을 찍는데 민주가 갑자기 나타났다. 정말 갑작스런 나타남이라 려욱, 기범, 동희까지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민주의 말에 성민이 지지 않고 받아치자 려욱이 호들갑을 떨어댄다. 정말 민주를 원망하는 말투에 민주는 상했던 마음이 더욱 심하게 빈정이 상해버렸다.
“려욱아. 솔직히 나 아니었음 저 인간 장단 누가 맞춰줬을 거라 생각하는 거니? 다들 얼굴보고 왔다가 성격보고 도망갔을걸? 세상에, 밑도 끝도 없는 브라콤이라니! 나 정도쯤 착하니까 봐준 거야. 생각하니 열받네. 얼굴 돼, 몸매 돼, 성격 돼, 집안 돼, 재산 돼. 내가 뭐 부족해서 널 쫓아다닌 거람?”
그때 갑자기 울린 핸드폰을 받은 민주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지더니 창백해졌다.
“아, 아무튼, 난 가볼 테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나쁜 놈! 려욱아, 누나가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민주씨!!!!!!!!!!!!!!!!!!!!!!!!!!!!!!!!!!!”
“여기 뒷문 없니!? 어떡해!! 곧 올텐데!!!!!”
“뭐가 온단… 왜 그래요, 누나?”
“민주씨!!!!!!!! 찾았어요. 부모님 상견례 오늘인데 왜 여기 있어요. 빨리 갑시다.”
“조, 종진씨… 그으게…… 아니 저는, 좀 더 많은 남자와 넓은 세계를 경험해봐야 할 의무가…”
“하하하하하하!!!!!!!! 그런 건 제가 다중연극으로 맛 보여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여러분 굿바이~! 청첩장으로 뵙지요~ 하하하하하~.”
갑자기 교실 뒷문으로 왠 남자가 큰 소리로 민주를 부르며 등장한 바람에 시끄럽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종진이 민주를 끌고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교실은 조용해졌다가 금새 시끄러워진다. 마저 사진 찍기를 요청해 오는 아이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은 후 교정을 나서는데 그제야 들어오는 검은 세단에 모두들 한 소리씩 내 뱉었다.
“우와- 저거 엄청 비싼 건데.”
“누군지 몰라도 부잣집 아들 나셨네.”
“내 월급 몇 십 년 모아도 못 사, 저건.”
“어, 저거…
기범이 무심코 말을 뱉자마자 려욱이 학교 건물로 다시 뛰어갔다. 그런 려욱을 잡지도 못 하고 성민이 멍하니 서 있자 동희가 비웃으며 말을 붙인다.
“저러다 규현이한테 가는 거 아니냐? 공주님은 역시 재력이 있어야 모실 수 있잖아.”
“흐음.”
“…기분 나빠… 성민이 형 저런 웃음 처음 봐요.”
동희의 말에도 별말 없이 그저 흐뭇하게 려욱이 간 곳을 바라보는 성민이다. 둘이 사귀는 것은 이미 동희와 기범도 알고 있지만, 려욱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저 려욱 혼자 조심하고 있는데 그걸 보는 것도 의외로 재미 있어서 성민은 당분간 말하지 않을 셈이다.
“
“…오랜만이네.”
“-응.”
규현의 인사에 려욱도 그 앞에 멈춰 섰다. 어두운 색의 긴 롱코트를 입은 규현은 양복을 입은 모양이었다. 차분히 옆으로 넘긴 머리가 갓 졸업한 20살의 모습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그 동안 일어난 일에 지쳤는지 꽤 수척해진 얼굴은 그늘이 짙었다.
“잘 지내.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고.”
“…… 그래.”
규현은 잠시, 려욱의 그런 태도로 미루어 성민이 말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정말 성민은 바보다. 그리고 아마 려욱은 평생 열아홉에 일어났던 그 일들의 원인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규현은 려욱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짧게 악수를 했다. 손을 흔들고 뒤돌아 뛰어가는, 멀리 작아지는 려욱을 보며 규현은 그제야 겨우 기도할 수 있었다.
안녕. 이제 정말, 행복하길.
**
려욱은 삐릭삐릭 기계음으로 울어대는 알람 시계의 버튼을 겨우 꾹 눌렀다. 욕할 기운도 없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는데, 방문을 벌컥 열고 성민의 고함이 쩌렁쩌렁 귀에 울린다.
“려욱아!!!!!!!! 학-교- 가-야-지!!!!!!!!!”
“악-!!!!!!!!!!!!!!!!!!!!!!!!!!!!!!!!!!!!! 시끄러!!!!!!!!!!!!!!!!!!!!”
재수를 마치고 상위권의 음대 작곡과에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일단 입학이 문제였을 뿐, 하고 나니 의외로 일은 순순히 풀려서 지금은 레슨비며 드라마 ost 수입료로 그럭저럭 돈은 충당하며 산다. 혁재는 언제든 원할 때 유학을 가라 했지만, 일단 언어가 안 된 상태에서 유학은 당연히 무리였다. 그렇다고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잘했던 것도 아니라서, 려욱은 매 학기마다 언어수업을 챙겨 들으며 전쟁을 하는 중이다.
소리를 지르고 베개를 뒤집어쓴 려욱의 몸을 덮은 이불을 확 끌어내린 것은 앞치마를 한 성민이다. 늠름하게 국자를 든 손은 허리 춤에 놓여져 군기대장의 모습을 뽐냈다. 그제야 겨우 퀸사이즈 침대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내려온 려욱은 시간을 확인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중간고사 실기 시험이 있는 날 아침부터 늦게 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늦은 건 아니지만 연습할 시간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밖으로 운동화를 구겨신은 려욱 때문에 덩달아 급해진 성민이 빵과 우유를 들고 현관으로 나온다.
“밥은!!! 밥 먹고 가야지!!!!!”
“됐어! 진작 깨우지 하여간 내가 못 살아!!! 나 갈게!!”
“잠깐, 잠깐만!!! 빵이라도, 빵! 우유!!! 맞다, 도시락!! 으악- 어떡해!!!”
“어딜 가!”
우유를 신발장 위에 놓고 도시락을 가져가려는 성민의 팔을 려욱이 잡아당긴다. 허우적거리며 돌아선 성민의 목 부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성민의 입에 가볍게 키스한 려욱은 만족한 듯 웃은 뒤 현관문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성민을 향해 활짝 웃으며 흔드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아침 햇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오늘도 굿모닝, 공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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