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님 소설의 패러디입니다. 저답지 않은 진지함이 ... 부담스러운 소설이죠. ㅋㅋㅋㅋㅋㅋㅋ
뭐랄까, 평소 제 모습을 생각하면 '뭐야 이거?' 하기 딱 좋은 소설입니다.
에구에구. 나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 뭘 이렇게 많이 썼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설의 테마송으로 생각했던 곡은 신혜성씨의 '시를 위한 시'입니다.
더보기
안녕하세요. 무더운데 몸은 건강하신가요? 요즈음 소나기가 많이 퍼부어서 이 동네 저 동네 난리도 아니던데 그 곳은 괜찮은지 걱정이 됩니다. 일전에 편지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시는 것이 이해되지 않지만 집을 정리하는 겸사 말씀하신 일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소설에 대해서 실화인지 저로서도 알지 못 합니다. 이 일기에 적혀있던 내용 또한 저는 놀라울 뿐이네요. 고인이 집을 나가신 후 저에게 남긴 이 하나의 일기가 소설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굳이 밝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하지만 기획하시는 데 필요하다 하시니 보내드리겠습니다.
소나기
려욱은 편지를 다 읽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상자를 보았다. 상자에는 으레 칼로 개봉하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칼을 대 개봉한 덕에 테이프 중간이 깔끔하게 잘렸다. 열려진 상자 안에 낡은 노트는 이미 주인을 잃고 세월에 그 옷마저 낡아버렸다. 그러나 생전 관리를 소중하게 한 덕인지 모양은 흐트러지지 않아 구식일지라도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은 옛 양반을 떠올리게 했다. 편지를 다시 모양대로 접어 봉투 안에 넣은 려욱은 커피포트 쪽으로 가 한 컵 가득 부어 가져왔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조심스레 노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문학 기사 특집으로 이제 고인이 된 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에 대한 떠도는 이야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편집회의에서 결정했다. 려욱은 굳이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파헤쳐서 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겼다. 문학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할 짓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막겠느냐는 뻔뻔한 사람마저 나왔다. 자신도 늘 찬밥 취급 받는 문학지가 이 기사 하나로 잠깐의 이목을 끌 수 있다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인은 결혼을 했지만 부인이 일찍 죽어버려 자식을 얻지 못 했고 말년에 몇 작품으로 성공했기에 유품을 관리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있던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은 그의 친척 조카라고 했지만 그것도 소문만 있을 뿐 불확실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불확실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마 운이 좋아 연락이 닿은 것이라 려욱으로서는 이 일기를 읽고 기사를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할 법했다.
첫 장을 넘기는 손이 살며시 떨렸다. 심호흡을 하고 려욱은 일기를 펼쳤다.
하나. 만남
“야! 야! 전학이다! 전학!! 서울에서 왔나봐!! 얼굴 무지 뽀얗고 이쁘다!!”
문을 벌컥 열며 혁재가 뛰어 들어 와 외치는 말에 짐을 싸던 아이들이 모두 술렁거렸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고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혁재의 머리 위로 선생님의 막대기가 툭, 하고 부딪혔다. 머리를 아파하며 원숭이처럼 낑낑거리던 혁재가 고개를 숙이고 들기를 반복하며 자리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뒤에 따라 들어온 남자아이 탓이었다.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분칠한 것 같은 아이는 반을 슥 둘러보더니 씩 웃었다.
“반가워. 이성민이라고 해. 잘 지내자.”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마을에 하나 남은 양반이라는 윤 초시 댁에서 쫓겨났다던 둘째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내려온 선생과 눈이 맞아서 서울로 기울어져가는 가세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지병이 있었던지 채 12년을 꼬박 넘기기도 전에 그녀는 목숨을 잃고 윤 초시는 그 아들을 데려와 키우게 됐다고 하던가.
곧 선생님이 교탁을 두들기며 청소당번을 남기고 나가라고 하자 잠시 아이들이 빠져나갈 동안 성민을 보다 교실 문을 나섰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교실 문 너머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곱게 웃는 모습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랴부랴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와 버렸다. 뛰어오는 길에 몰랐는데 집에 도착하니 코피가 나 있었다. 부끄러웠다.
둘. 인사
성민은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책을 읽거나 아이들이 말을 걸면 대꾸해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며칠 더 지켜보니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그에게 어울릴 것을 권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체육시간에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약했던 것이다. 그에 더해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가 풍기니 아이들이 지레 짐작하고 그에게 노는 것을 권하지 않은 탓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친절했지만 무턱대고 착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혁재가 그에게 뛰지도 못 하는 게 병신 같다 놀리니 그를 두고 놀리는 혁재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하듯 술술 내뱉었다. 끝에 가서 울며 그런 것은 싫다 하는 혁재를 두고 앞으로는 착하게 살라 훈계까지 했다.
반에서 제일 개구쟁이인 녀석을 그리한 덕에 모든 아이들은 함부로 성민을 대하지 못 했다. 형 같은 모습에 아이들 모두 성민을 좋아하고 어느새 따르고 있었다. 그에 어울리지 못 하는 것은 나뿐인가 싶었다. 선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를 형처럼 좋아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와 있으면 어색해져 모두와 함께 있을 때나 둘만 있을 때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아니라 정말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안녕? 아침에 둘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네, 동해야.”
“아- 어. 그러네.”
그렇기에 오월의 아침에 우연히 일찍 온 교실에 그를 본 것은 굉장히 의외의 사건이었다.
“늘 이렇게 일찍 오니?”
“그건 아니야.”
다른 말을 덧붙이거나 성민에게 무언가를 물었으면 좋았으련만 입을 빨래집개로 집었는지 말을 잇지 못해 금세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동해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햇살과 바람이 동시에 쏟아져 들어와 교실을 돌아다녔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아니.”
“그럼 나한테만 그래?”
“아니.”
“아니만 아니?”
“아니. -풋.”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와 둘만 있는 시간이 처음으로 편하게 느껴졌다. 둘이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했다. 아까운 시간이 금방 흘러 다른 아이들이 들어오고 둘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셋. 바보
성민은 심장이 좋지 않다고 했다. 선천적인 것인데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것이라 했다. 수술을 하려면 큰돈이 필요해서 서울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돈을 버는 것이라고 했다. 수술을 말하는 성민의 이야기에 동해는 선뜻 호응하지 못 했다. 이 시골에서 수술이란 말이 나오는 병이란 고칠 수 없는 병임을 의미했다. 어쩐지 윤 초시 얼굴에 주름이 는 것이 괜한 게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성민이 쓰러져 조퇴한 날 동해는 길의 자갈을 굴리며 걸었다. 이전에는 성민과 가는 길이 같았기 때문에 성민이 늘 앞에 걷고 자신이 뒤따라 걷고 했는데 이제는 아무도 앞에 없다. 그게 당연한 건데도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괜히 우울해지려는데 개울이 앞에 나타났다. 이 개울을 건너 갈림길이었다.
- 성민이 있었다.
그가 징검다리 가운데에 앉아 물을 찰방이고 있었다. 따갑게 유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데도 흰 옷의 긴팔을 걷어 부치고 내천 바닥의 자갈을 고르는지 자신이 온 것을 눈치 채지 못 해 보였다. 길을 비켜줬으면 하지만 어쩐지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에 지켜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자 흐르는 물결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멍한 표정을 노려보니 눈이 찌푸려 보기 싫었다. 고개를 들자 성민이 어느새 갈림길을 들고 있었다. 멍하니 보다가 성민이 사라지고서 물을 쳐냈다. 무언가 짜증스럽다.
넷. 여름이 오면
방학할 때까지 성민은 학교에 오지 않았지만 동해는 그를 매일 보았다. 늘 냇물의 징검다리 가운데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종업식을 하는 날에 동해는 집에 늦게 갈 심산으로 느긋하게 걸었다. 성민이 또 개울가에 나와 있었다. 더운지 세수를 하는데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온다. 그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물장난을 치는 듯하다. 빤히 보다가 또 비켜달란 말을 못 하고 고개를 숙여 물결에 비치는 자신을 보는데 흰 돌이 툭, 떨어져 물에 비친 얼굴을 뭉개 버린다. 고개를 드니 성민이 어느새 징검다리 끝에 가 자신 쪽으로 돌을 던진다.
“바보야.”
벌떡 일어나니 어느새 사라진 모양이다. 다른 남자 아이였다면 두들겨 패주었을 텐데 성민이 자신에게 바보라 하는 말은 오히려 마음에 남아 젖어든다. 기분이 나쁜 건지 심장이 쿵쿵 뛴다. 다시 앉아 떨어진 흰 조약돌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물기에 잠시 주머니 안쪽이 젖는 것 같더니 집에 돌아와 꺼내보니 말라있었다.
다섯. 들꽃을 꺾어
성민은 또 한참 뵈지 않았다. 동해는 부모님의 심부름이나 소 풀 먹일 것을 핑계로 대고 매일 냇가를 서성거리곤 했다. 하루 종일 성민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그랬다. 혹여나 있을까 싶어. 하지만 번번 허탕을 치면 동해는 주머니에 넣어둔 돌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손으로도 돌이 닳을 수 있다면 아마 이미 모래가 될 정도로.
할 일도 없는 팔월 초에 동해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나중에 새참 가지러 오라고 한 약속만 지키면 되겠지, 쉽게 생각했다. 참 이상하게.
- 성민이 있었다.
동해는 그를 보다가 돌아섰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성민이 마침 자신을 보더니 일어나 다가온 탓이었다.
“아!”
“괜찮어?!”
짧은 비명에 되레 동해가 기겁해서 성민에게 달려갔다. 성민이 땅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이렇게 만든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나서 성민을 업으려는데 성민이 동해를 보고 씩 웃는다.
“속았지.”
“야!!”
“바보야.”
“어휴….”
동해가 성민을 보며 할 말을 잃고 한숨만 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세 일어선 성민은 천천히 길을 걸으며 들꽃을 꺾었다. 동해도 어쩌다 보니 일어나 그 옆을 걷고 있었다.
“이거 뭐야?”
“메꽃.”
“이건 뭐니?”
“칡꽃.”
“너 참 많이 안다.”
“…그거야 여기 사니까.”
그러고도 꽃 몇 가지를 더 따더니 동해에게 쥐어준다.
“하나도 버리면 안 돼.”
“알았다.”
“저 산 가봤어?”
“당연하지.”
뽐내듯 말했다. 자신의 집으로 가는 빠른 길이 산을 넘는 것이기에 가끔 타고는 했다. 신기하듯 보는 성민의 눈에 의기양양해졌다.
“가보자.”
“멀 텐데.”
성민의 몸이 걱정된 것이지만 오히려 표정이 삐죽해진다.
“그럼 안내만 해. 나 혼자 갈 테야.”
“길 잃는다. 잠깐만 다녀오기야.”
뭐가 좋은지 금세 표정이 밝아진다. 정말로 산에는 볼 것이 없는데도 왜 가고 싶은지 모르겠다. 게다가 먹구름이 끼는 것이 곧이라도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다. 동해는 다시 성민을 돌아보고 말리려다 말았다. 옆에서 걷는 성민의 얼굴이 너무나 들떠 있었다.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는 것에 또 픽, 웃고 말았다.
“뭐가 웃기니?”
“어……. 노래 좋다. 서울 노래니?”
“음악시간에 놀았구나. 우리 배우는 노래야.”
머쓱해져 뒤통수를 긁으니 또 키득거리며 웃는다. 저와 있으면 늘 웃는 것 같다. 자신이 그렇게 웃긴가 생각하다가 그냥 또 웃었다. 성민이 웃는 것 만만찮게 자신도 웃는 것 같다.
여섯. 소나기
성민이 노래를 가르쳐주며 나란히 걷다가 산을 넘었다. 늘 체육시간에 앉아있던 것 같더니 그런 것치고는 운동신경이 좋다.
“서울에 있을 때 체육 좋아했어. 몸이 안 좋아서 매일 하지는 못 했지만.”
표정에 궁금한 것이 보였나 보다. 동해는 또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성민이 또 웃고 그러며 산을 마저 내려오자 소가 나무에 묶여 풀을 먹고 있었다.
“신기해라.”
소에 가까이 가지 못 하면서도 소가 예쁜지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 한다. 동해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성민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성민도 다가와 소를 만졌다.
“착하구나.”
그렇게 한참 멈춰 있는데 멀리서 주인아저씨가 뛰어온다.
“곧 비 올 텐데 안 들어가니? 어른들 걱정한다.”
하더니 성민을 흘긋 보고는 동해를 보고 타이른다. 금세 소를 데리고 사라진 주인을 보고 동해가 입을 열었다.
“돌아갈까? 다음에 가도 되고.”
“조금만 더 가자. 네 집이 보일 것 같은데.”
가는 길을 말한 적은 없는데 잘 알고 있다. 동해는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좀 더 걸었다. 결국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더니 후드득 소리를 내며 퍼붓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더 걸친 옷도 없는데 성민이 추울까봐 걱정이다. 마침 가까이 있는 오두막에 들어갔다. 구석에 앉는데 성민의 입술이 새파랗다. 덜덜 떨고 있는 얼굴 옆선으로 빗방울이 흘렀다. 동해는 다시 오두막을 나와 그 아래에 있을 덮을 만한 것을 찾아냈다. 겨우 성민만 덮어주려는데 성민이 팔을 끌어 자신을 구겨 넣는다. 성민의 분홍빛 스웨터가 젖어 들어갔다. 맞닿은 부분으로 이어지는 체온이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겨우겨우 비가 그쳤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저물어가는 노을이 얄밉다. 돌아가는데 산이 꽤 높다. 오르려다 넘어지려는 성민을 억지로 업어 산을 올랐다. 계속 가려는데 성민이 고집을 피워대 산을 다시 넘자마자 내려놓았다. 갈림길까지 가는 길이 턱없이 짧았다. 인사를 하고 웃으며 꽃을 건네받고는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성민이 야속하게 아쉬웠다.
일곱. 그 하루가
팔월의 느지막하게 비가 쏟아졌다. 덕분에 날씨는 급격히 싸늘해져 가을을 넘어 겨울이 온 듯 추워졌다. 통 밖에 나가질 못 하던 동해는 성민이 무얼 하고 지내나 궁금했다. 이렇게 지루한 시간은 처음이었다. 비가 오지 못 해 밖에 못 나가는 것이 이렇게 지루한 것인 줄 몰랐다. 일을 안 해 기뻐야 정상인데 왜 이럴까. 동해는 흰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방에서 뒹굴 거렸다. 그러다 성민이 가르쳐 줬던, 그날 성민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중얼거렸다.
눈을 감으면 가르쳐주던 성민의 열심인 목소리가, 눈빛이, 표정이, 얼굴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손에라도 잡힐 듯이. 허공에 손을 뻗어 휘저으면 헤집어질 것만 같은데 손을 내리면 이내 떠오른다. 동해는 바닥에 엎드려 누워 손가락을 땅바닥에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가사가 잘 생각나지 않아서 멜로디만 흥얼거렸다.
빗소리에 잠깐의 그 서글픈 음은 너무나 쉽게 묻혀버렸다.
여덟. 징검다리
개학을 얼마두지 않고서 해가 다시 떴는데도 성민은 또 잘 뵈지 않았다. 이제는 동해가 그 징검다리 중간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어른이 와서 보고 혼을 내도 아이들이 와서 놀려도 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개학 전날에 만난 성민의 얼굴은 아주 창백해져서 푸른빛마저 돌았다. 동해는 직감적으로 그 날 소나기에 성민의 병이 더 심해진 것을 알았다.
“조금 아팠어.”
희미하게 웃는다.
“소나기 때문이지?”
“응.”
“다음에 가자고 했었잖아.”
“미안해.”
“몸은 좀 괜찮아?”
“다 낫진 않았는데 집은 너무 답답해서.”
아픈 데 나온 것이다. 동해는 표정이 구겨졌다. 자신의 앞에선 성민처럼 편하게 웃을 수 없다. 동해의 표정에 성민이 정말 미안한 기색을 띠더니 뒤에 감추던 손을 내밀었다.
“대추야. 내일 제사라고 따더라구. 달아.”
“아….”
“근데 이 물 어디서 든 건지 알겠어?”
대추를 동해의 손바닥에 옮겨준 성민이 자신의 옷을 죽 늘렸다. 분홍빛 스웨터에 갈색 물이 얼룩하니 져 있었다. 동해는 잠시 성민이 왜 묻는지 생각하는데 성민이 샐쭉하니 웃는다.
“그 날, 너한테 업혔을 때, 옮은 거야.”
“…….”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 곧 서울 가. 가긴 싫지만, 수술해야 한다니까….”
“그래….”
“가볼게.”
동해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성민이 보고 싶었다. 지루했던 이유는 성민이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것은 쥐어준 대추뿐이었다. 어느새 성민은 갈림길 멀리 가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굳었는지 떨어지질 않는다.
아홉. 선물
동해는 공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민이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일까. 불안을 떨치려고 잠깐 뛰다가 잠시 걷는 것을 반복했다. 괜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호두 밭이 보였다. 알알이 굵은 호두를 보던 동해는 잠시 고민하다가 약간 노른 물은 든 몇 알을 겨우겨우 손을 대 땄다. 발로 꾹꾹 밟아 연두빛 살 속의 단단한 갈색 껍질의 호두를 끄집어 냈다. 처음에는 들키면 어쩌나 잠시 고민하다가 기뻐할 성민을 생각하니 절로 힘이 들어가 생각보다 많이 따고 말았다. 주섬주섬 숨겨 오다가 내일 학교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호두를 숨겨놓고 하늘 한 번 보고 한숨 한 번 쉬고 반복하다 어머니에게 웬 애새끼가 한숨이 많다며 혼나고 말았다.
정말 바보네, 바보. 바보야.
그런데 어머니가 닭장에서 닭을 한 마리 골라내 잡아 아버지에게 준다. 어디 가시느냐 여쭈자 동해 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윤 초시 네에 제사상 올리라고 닭을 주러 간다고 했다. 순간 따라갈까 생각했다가 마뜩찮아 괜히 수탉을 보았다.
“저 놈이 나을 텐데…. 큰 게 낫잖아요.”
“그래도 얘가 실속 있어. 요즘 알도 잘 낳는 게. 아무렴 섭섭잖게 할까.”
어머니의 대꾸에 뒤통수만 긁고 아버지를 배웅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생각했는데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눈을 슬며시 뜨다가 다시 감았다. 일어나 있으면 어차피 어머니가 자라고 할 것이 빤했다. 졸음이 밀려오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깼다.
“오셨어요?”
“그래…. 허, 그런데 참 큰일이야.”
“어째서요?”
“곧 서울로 간다더니 그 며칠을 못 버티고 가는 구만 그래.”
“……결국…. 혈육은 그 아이 하나였지 않나요.”
“그런 셈이지. 말도 아니야, 정말. 그 많던 전답 다 팔고, 집도 팔고, 그래도 그 아이 하나 믿고 버티던 풍전등화였는데. 줄초상이 이렇게 나도 나는가 그래.”
“참 운이 없네요.”
“그렇지. 근데 애가 참 잔망스러워. 글쎄 자기 죽기 전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묻어 달라 했다지 뭐야?……”
려욱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다시 한 번 넥타이를 다잡아 맸다. 칼로 재단한 듯 반듯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에는 먼지 하나 용납하지 않을 느낌을 주었다. 예상한 시간보다 빨리 도착한 산에는 이미 간병인이었다던 기범이 나와 있었다. 검은 정장을 바짝 차려입은 려욱과 달리 기범은 꽤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다. 려욱은 노트가 담긴 서류 봉투를 꺼내 확인한 후 기범을 따라 산을 올랐다. 중턱쯤에 오르자 아래쪽에서 쭉 보이던 무덤에 멈출 수 있었다. 무덤가는 훤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기범은 준비해온 술과 간소한 안주거리등을 무덤 앞에 가지런히 놓고 려욱을 데려와 절을 했다. 갑자기 절을 하는 기범을 보고 려욱도 얼결에 했다. 두 번 절한 후 일어난 기범이 따라놓은 술잔을 무덤을 돌며 뿌렸다.
“…본명이, 이동해…이었군요.”
“필명이 이성민이고요.”
기범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보면 마을이 훤히 보여요. 저 곳이 예전 윤초시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범은 잠시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이 산에 이성민씨의 유골이 뿌려졌다고 하더군요.”
“…그렇단 건, 그 일기는 모두 진실이란 거군요?”
기범은 려욱의 확신이 담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먹구름이 몰려왔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두 사람 모두 말없이 맞고 있었다. 결국 빗줄기가 굵어지자 려욱이 준비해 온 우산을 펼쳐 들었다. 기범에게 씌워주었지만 여전히 기범은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동해의 이복아들입니다.”
“…미안해요.”
“그는 좋은 아버지였고, 제 어머니의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어요. 처음엔 저에게 모든 것을 말한 아버지가 이해되질 않았어요. 또 평범하게 살다가 늦게야 등단한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말하고 싶었던 걸 거예요.”
“…….”
“평범한 그 누구라도 가슴에 묻은 사랑이 있다는 것을요. 세월이 지나고 기억에 바라져도 영원히 함께하는 그 누군가가,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요.”
기범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꺼내진 조그만 주머니의 끈을 풀자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나왔다. 흰, 조약돌이었다.
“이젠 그만 쉬게 해주고 싶네요.”
려욱은 휴대폰 액정을 보고 미소를 띠며 받았다. 처음 연락을 할 때와 달리 꽤 밝은 목소리의 기범이었다.
[“책 잘 보았습니다. 감사해요.”]
"별 말씀을요.”
특집은 작가 이성민의 10주기를 기리는 면에서 그간의 비평문들과 작품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한 글을 실었다. 처음에는 반발했던 다른 사람들도 고인에 대한 흥미성을 인정하고 새롭게 기사를 편성하는데 적극 찬성하고 도왔다.
[“이제 정말 편히 쉬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로요.”
려욱이 기범과 만났던 날에, 기범은 동해의 무덤가 옆에서 소나기가 그친 후 일기와 조약돌을 보관했던 주머니를 태웠다. 남은 재와 조약돌을 비석 앞에 기범과 함께 묻은 것은 둘 만의 비밀이었다.
작가 이성민의 본명은 이동해였고, 그는 기범을 아들로 둔 양아버지였고, 기범의 어머니의 좋은 남편이었다. 그는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한 인생을 살았으나 말년에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유년시절 한 사람과 진정 마음으로 이어졌던 기억을 평생 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